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양반의 사생활-2008년의 책읽기 35

자몽미소 2008. 9. 28. 21:12

 

 

 

아버지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문을 하지 않는 아들, 그러면서도 입신을 위해 끊임없이 과거 시험을 보러 다니는 아들은 아버지의 눈으로는 소인배와 닮아 보였다. 아들이 어울리는 친구들, 아들이 도모하는 일 어느 것 하나 좋아보일 때가 없었다. 아버지는 편지를 통해 아들을 가르치려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여러 곳으로 보내는 편지를 먼저 읽었고 그 속에 자신에게 건네는 가르침을 보긴 했지만 아버지의 바람대로 살아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산골에 살면서 책을 읽었고 아들은 번화가에 살면서 벗과 놀았다. 서로 상반된 삶을 마주하며 아버지와 아들은 자기 삶에 더 몰입했다. 아버지는 더욱 더 공부를 했고 공부한 내용대로 삶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입신양명을 위해 책을 봤고 답답한 아버지의 권유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사선이었다.  접합점이 없는 두 인물은 공부의 목적이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사는 방법, 사는 장소까지 상반되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편지를 버리지 않았고,   읽고 나면 태워버리라는 부탁을 적은 쪽지까지  보관해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아버지는 1700 여 통의 편지를 아들에게 남겼다. 아들은 아버지의 편지를 세상 밖으로 전달하고 세상에서 아버지에게 오는 편지를 받아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아들은 우체국이었고, 아버지와 세상 사이의 다리였다.

 

종이 편지가 거의 사라져 버린 오늘날에 이르러 이 편지들은  다시 우리들에게 발송되었다.  조선 후기 양반의 글자가 아니라  한글로 만든 한 권의 책으로 온 것이다. 이십 여년 전 버려진 듯 상자에 담긴 고서를 발견한 이가 있었다.  저자 하영휘 씨는 이단 문고라는 대기업의 문화 사업의 일원이 되어 고서를 정리하고 분류하다가 이 편지 묶음을 발견하였고 그 편지 속에서 조병덕이라는 몰락양반을 만나게 되었다. 조병덕의 편지는 하영휘 씨에게 와서  해석되기 시작했다. 순한문인 조병덕의 편지는 전공자가 아니면 읽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꼼꼼히 그의 가계를 살피고 그 시대를 함께 연구해가면서 조병덕의 삶을 그려나갔다. 저자 하영휘 씨의 새로운 글쓰기 덕분으로  나는 오래 전 시간을 살았던 아버지의 한 생을 읽고 그와 관련한 인물들의 삶을 어렴풋이 보게 되었다. 인물 뿐만이 아니라 그 시간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지방의 몰락한 양반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그때 고민하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고고한 성리학의 이념이 땅으로 내려와 실천되고자 할 때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지를 볼 수 있었다. 또한 편지 속에는 양반이기때문에 겪어야 하는 말못할 고민까지 들어 있었다. 누추하고 때로는 유치하기 까지 한 사람살이, 아들에 대한 잔소리, 며느리에 대한 섭섭함, 제사를 지낼 돈이 부족하거나 밤에 불을 밝힐 초가 부족한 것에 대한 염려, 와야 할 선물이 늦을 때의 초조함도 있었다. 아버지는 평균 6일에 한 번은 편지를 썼고, 끊임없이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배운대로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꺽지 못했다.

 

이 책의 소중함은, 19세기를 살았던 조선 양반을 통해 그 시대를 엿볼 수 있다는 데서 충분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더 가치있게 보이는 것은, 공부한 대로 살고자 했던 유학자 조병덕과 그런 아버지가 싫어 그와는 정반대로 살아갔던 아들의 갈등이다. 아들의 답장이 없으니 그 소상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 아버지의 편지만으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수많은 일들의 전후맥락을 다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런데도 편지는 아버지가 죽는 날까지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잘 읽힌다.

한문장인 편지의 한글 번역이 매끄러운 덕분이다. 또, 조병덕을 둘러싼 역사와 사회 상황을 잘 읽어낸 저자의 학문이 보태져서 조병덕 개인을 넘어 조선시대 양반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상황이겠지만, 배운대로 사는 일은 참으로 어려우며 강을 역류하며 헤엄치는 것처럼 고달퍼 보인다. 

 그러나 이 100년 전 인물의 궁색해 보이는 삶은 이 시대를 다시 묻는듯 하다. 배움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배움을 자기 수신으로 여겼던 이에게 그 질문은 일생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고,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덕이다.

  

 

*****종이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

 

 

요즘에 종이 편지를 쓰려면 시간과 돈이 걸린다.

이 메일에 익숙해지다보니 손으로 글자를 눌러 쓸 일, 우체국을 찾아가 우표를 사고

편지지와 봉투를 고르는 일이  간편한 이 메일 기능에 덧붙이는 비용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 이메일조차도 받기 어렵다

나 또한 메일을 거의 쓰지 않는다

정해진 곳에서 보내오는 스팸메일과 광고메일을 매일 지우는 게 로그인 후 해야 하는 일이다

 

이 메일은 휴대폰 문자 메세지 기능이 나오면서 서서히 안 쓰게 되는 문명의 이기인데

바로 이 메일이 종이 편지 쓰기를 지워 나가듯 문자 메세지 힘에 눌려 뒤로 물러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신속하고 값싼 것들이 더디고 비싼 것들을 대체하는 시대다

 

그런데 그 내용도 껍데기와 비슷해져서  알맹이 없는 것들은 무게도 없다

 

무엇을 들여야 하는 것, 정성, 시간, 돈, 마음, 

 

 

그래야 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