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개와 함께 찍은 강호순 이란 이의 사진을 봤다. 기사의 내용은 끔찍하고 끔찍했다. 그래도 꼭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이유라는 걸 찾고 싶었으나 전문가의 어떤 진단에서도 이해의 핵심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젯밤에 본 영화 <체인질링> 또한 그러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부패한 경찰과 권력이 어떻게 가공할만한 힘의 남용을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힘으로 부패와 싸워 나가던 여자의 이야기이다.
용산 사태, 촛불 집회, 미네르바 등을 다루는 권력의 태도를 이 영화에서도 봤다. 그들은 자기 힘에 도전하는 것들을 몹시 못 참아 하고 정의를 조롱한다. 특히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더욱 더 짓밟는다.
이들의 주위에는 그들을 돕는 조력자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사고하지 않는 듯한 이들의 조력 때문에 부패한 권력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영화에서는 경찰청장, 시장, 병원장,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재 한국엔 누가 조력자들인가, 권력 주변엔 무사고 인간들이 많다. 사고하는 순간 일용할 밥그릇이 깨지기 때문인가.
아이를 잃은 어머니를 다루는 영화의 뒷편에는 이유없이 아이들 납치하고 죽이는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거리에서 다정한 말로 아이를 꿰어 자기 차에 싣고 가서는 자기 농장에 가두었다가 죽인다. 아이들이 엄마를 찾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하는 말을 일체 듣지 않는다. 포획한 것을 절대 놓치 않는 짐승의 표정으로 이 남자는 아이를 죽인다. 아이만을 잡아다 죽이는 이유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자기 맘이다. 자기 농장에서 여자들을 죽이며 사람 죽이는 데 무슨 이유가 있냐던 강호순을 본다.
그러나 그런 끔찍함은 범인들만 하는 건 아니다. 부패한 경찰도 마찬가지다. 여자를 가둘 때 자기 맘에 안 들면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여자가 간곡하게 하는 말은 듣지 않는다. 여자가 경찰에게 감히 저항하는 것에 죄의 무게를 싣는다. 법 절차 같은 건 무시해도 된다. 서류는 꾸미면 되는 것이고 언론은 권력이 기획한대로 움직여 주니까. 그래서 경찰은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엄마의 말을 결코 듣지 않는다. 아이의 키가 작아질 수도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마저 서슴치 않는다. 여자는 자기 아이를 거부하는 이상한 엄마가 되어서 정신병원에 갇히고, 경찰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는 남자는 아이 사냥을 계속한다.
물론 남자는 잡히고 부패 경찰관은 시민들의 항의에 물러났지만, 1928년부터 35 년 사이의 이야기에서 나는 2009년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겹쳐 보고 말았다. 김석기는 대통령의 보호 아래 그 자리에 책임을 다한다는 구실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고, 해외에서도 웃음거리가 되는 미네르바 구속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불도저는 여기 저기서 국민의 가슴을 파헤치면서 이게 선진한국의 나아갈 길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은 믿지 않는 걸 그들은 믿으라고 한다. 여자는 이게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경찰은 그게 네 아들이라고 믿고 살라는 것과 같다.
이 씁쓸한 영화에서 그래도 클린트이스트우드는 희망이라는 말을 남겨 두었다. 희망은 정의라는 이름과 어울리기에 부패를 무너뜨리는 것은 권력의 속임수를 바로 볼 수 있는 자기 각성이다. 자기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각성하는 자 만이 부패에서 멀어지고 희망과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여자를 돕던 목사, 평생 부패 경찰을 비판하던 목사처럼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부패와 거짓과 조롱 쪽엔 없고 정의와 사람과 믿음 쪽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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