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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기층문화에 대한 일고찰-현용준

자몽미소 2009. 2. 7. 00:00

제주도 무속과 그 주변, 현용준,집문당

 

486쪽

 

13. 제주도 기층문화에 대한 일고찰

 

1.서언

2.선사시대의 문화

제주도에 선사시대의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지석묘 마제석기 무문토기 또는 주거지라 생각되는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확실하다. 이 선사 시대의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가 문제이다

이 선사시대의 문화형태를 얼마간 추측할 수 있는  문헌 기록이 몇 개 있다. 그 기록부터 보아 나가기로 하자. <후한기> 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제주도에 대한 기사로 보이는 주호의 기록이 있다.

 

또 주호(州胡)가 있으니,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 위에 있다. 거기의 사람들은 키가 작고 언어가 한(韓)과 같지 않다. 모두 머리를 깍아 선비(鮮卑)와 같다 가죽옷을 입고,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는데, 그 옷은 위에는 있되 아래는 없어서 마치 벗은 모습과 같다. 배를 타서 중한(中韓)을 왕래하며 무역을 한다.( 동이전 한조)

 

 

호주가 마한의 서해 가운데 큰 섬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이 제주도에 관한 것인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기사는 주호인의 신자잉 왜소한 것, 언어가 마한과 같지 않은 점 등, 그 체질적 언어적 특징을 기술하고 있음과 더불어 의생활과 생업의 모습도 살필 수 있게 한다. 즉 "소나 돼지를 좋아하여 기르는 것", "배를 타고 한과 왕래하면서 무역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 생업이 농업과 어업이 주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소, 돼지 등의 가축 사육은 정착 농경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도, 한과 왕래 운운하는 것은 항해술, 어로 기술의 발달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시조신화도 선사시대의 생업 형태를 말해주는 자료이다

<고려사지이지>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 한라산의 북녘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혈이라 하니 이 곳이 그것이다. 맏이를 양을나라 하고 다음을 고을나 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 라 했다. 세 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줏빛 흙으로 봉해진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서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돌함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줏빛 옷을 입은 使者가 따라 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쪽 바다에 있는 산에 선자 세 사람이 탄강하시고,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시어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사오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서 대업을 이루소소"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세 사람은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들고, 물이 좋고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점치니 양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일도 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라 했으며, 부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 삼도라 했다. 비로소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니, 날로 살림이 풍부해지더라

 

이 신화는 시조의 지중출현과 그 보필자가 바다 저편에서 箱舟로 표착한 것을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던 수렵생활에서 오곡을 파종하고 소와 말을 기르는 농경생활로 이행한 것을 말하고 있다.

제주도의 옛 명칭은 탐라, ** ** ** 모라 등 많은데  담라사람이 가죽옷을 입고, 농경생활을 하고 있던 것은 <당서> -동이전에도 보인다

 

龍朔 초에 담라 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임금 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어 入朝했다. 그 나라는 신라의 무주 남쪽 섬 위에 있는데, 풍속이 질박하고 거칠다. 개나 돼지의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초막에 살고, 겨울에는 굴 속에 산다. 땅에서는 오곡이 나되 경작하는 데 소를 이용할 줄을 알지 못하고 쇠스랑으로 흙을 고른다.

 

이 3 개의 문헌 기록은 선사시대의 언어, 의식주, 생업 등 많은 문제를 시사해 주는데, 경제 형태를 중시해서 볼 경우, 대충 말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렵문화 농경문화 어로 문화가 있었던 것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이행한 것

각 문화가 단독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농경, 어로가 복합형태로 있었던 것

 등이다.

 

중략>>>

이 농경 문화라고 하는 것은 위 문헌 기록에서도 본 것 같이 농경 단독이 아니라 어로 문화와 복합된 형태니까 결국 농경* 어로민복합이 되는 것이다. 이 문화 복합을 민속 자료를 가지고 탐구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이 의도하는 바다.

 

2. 조 농사 중심의 잡곡재배 문화

 

농경문화라 해도 모두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괴근(塊根)재배민문화도 있고, 곡물재배민 문화도 있기 때문이다. 곡물재배민 문화도 또 도작(稻作)문화, 조 농사 문화, 보리 농사 문화라는 식으로 따로 따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문하의 기본구조가 각각 다른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경우 괴근재배(덩이뿌리)재배문화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설화에 괴근재배문화적 요소로 생각되는 것이 약간 보이는데( 삼공본풀이가 이에 해당된다--- 쫓겨난 막내 딸이 마를 파 먹고 사는 마퉁이 형제를 만나고 막내마퉁이의 호ㅡ의로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된다. 막내딸은 막내 마퉁이와 인연을 맺어 부부가 된다. 다음날 마를 파러 가 보니 마 파던 구덩이의 돌덩이 흙덩이가 다 금덩이 은덩이가 되어 일약 거부가 되었다) 일반 생활 민속에서 발견하기 어렵고, 오늘날 재배되고 있는 고구마류는 최근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다. 가령 괴근재배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오늘날 제주도의 기층문화 형성에 있어 중시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문제는 곡물재배문화에 한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떤 곡물 재배였는지가 문제다'한국의 일반적인 주농업은 稻作인데, 제주도의 경우는 水稻耕作이1.9 %애 지나지 않는다. 즉 제주도의 총면적 1,820,02 평방 km중 농지 면적은 505,68km인데 그 중 밭은 496,01 평방km 이고, 논은 9.67평방km 로, 경지총 면적의 1.9%에 해당한다(1975년  제주도총게연보) 이 논도 최근 만든 것이 많으므로 고대에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도작문화가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은 아닌데, 들어와도 풍토적 조건 떄문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조 농사를 중심으로 한 잡곡재배문화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주도의 농경은 밭농사이다. 주된 작물은 조를 중심으로 한 피,메밀,콩류의 재배와 보리 재배이다. 현재는 고구마류, 유체 등 환금작물 경작이 성해 가고 있는데, 1930 년대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도 주된 작물은 보리, 조, 메밀, 피 등이었다( 조선총독부검사자료 1937년간행)

보리 재배와 조를 중심으로 한 피, 메밀 등의 재배가 동일 종족에 의해 들어왔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종족에 의해 시간차를 두고 들어온 것인지는 알기 어려운 문제이다. 전자를 보리 농사 문화, 후자를 조 농사문화라 구별하고 각각 시간차를 두어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데, 오늘날의 단계에서는 이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도 제주도의 기층문화 형성에 있어서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보리 농사 보다 조 농사이고, 따라서 조 농사가 보다 오랜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를 들어보기로 하자.

(1)먼저 그 종류부터 보건대, 제주도에서 재배하고 있는 보리의 종류보다 조의 종류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보리에는 주로 겉보리와 쌀보리가 있는데 쌀보리의 재배가 시작된 것은 볓 십년도 되지 않고, 예전에는 겉보리 뿐이었다( 1937년 당시의 맥류생산상황을 보면, 대맥이 94.5 %, 나맥이 3.2 % 소맥이 2.3 %로 되어 있어 나맥이나 소맥은 당시까지도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조는 메조와 차조로 대별되고 다음의 9 종류가 재배되고 있다.

메조- 흰돌화리, 붉은돌화리, 강돌화리,맛시리

차조-쉐머리시리, 개발시리, 노랑희린조, 대국희린조 터럭희린조

 

이상 메조에 4 종류, 차조에 5종류가 재배되고 있는데 원래부터 조의 종류는 보리보다 많다 해도 이같이 많은 종류가 들어와 보급되는 데에는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라 생각된다

 

조의 명칭을 보면 특징적인 것은 -화리 -시리  라는 접미사 위에 흰- 붉은- 쉐머리- 개발 등의 말이 붙여져 있는 점이다.

흰, 붉은 등의 말은 그 조의 이파리색을 표현한 것이고 쉐머리  개발 등은 그 조의 이삭 끝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로고 보면  화리  시리  라는 접사가 조를 나타내는 말이 되는 셈이다 이 화리 계, 시리 계의 접미사의 어원과 계통을 알면 이 조의 전파 경로 문화의 계통도 분명해 질 것 같은데, 그 어원과 계통은 알 수 없더.

 

(2)보리에 비해 조는 그 씨앗의 취급 방법이 특수하다. 씨앗으로 쓸 조는 보통 수확하기 전에 잘 자라 익은 것을 골라서 그 이삭만을 따 온다. 이것을 도리깨질로 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비벼서 떨어낸다. 그래서 <씨부게기>라는 씨 자루(짚으로 작은 항아리처럼 결은 것)에 넣어 천장에 달아매어 보존한다. 이 씨앗은 식량으로 먹는 일이 없고 고이 보존해 두었다가 다음해 조를 파종할 때에 뿌린다 또 씨앗을 떨어낸 후의 이삭 찌꺼기는 집 가까운 정결한 돌 위에 놓고 돌로 덮어 둔다. 보리의 씨앗은 이와 같이 정성스럽게 취급하는 일이 없다. 오늘날 이것은 단지 종자의 보존법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본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한다.

 

(3)보리는 여러 가지 제의 때 제물의 재료로 쓰이는 일이 거의 없는데  조는 그 재료로 많이 쓰인다. 제의에서 주요한 제물인 메, 떡, 술이 좁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제물인 메는 쌀밥이 일압인데 토지신제나 마을제인 포제 등에서는 쌀메와 함께 좁쌀메가 주요한 제물로 올려진다. 이는 중국 제법과 함께 전래한 것, 즉 도량서직( 稻 粱 黍 稷)의 메를 올리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유교 제법의 전래 이후의 것이라는 단순한 해석에는 찬성할 수 없다. 한국 본토에서는 5월에 단오에 밀국수를 조상의 차례에 올리고 음복하는 일이 있는데 제주도에서는 단오에 밀로 만든 빵을 올리는 것 외에 다른 보리 요리를 올리는 일이 없다. 일로 만든 빵을 제물로 올리는 것도 최근에 시작된 것이다.

제물에 쓰는 술은 차좁쌀 떡에 누룩을 섞어 만든 청주가 제일 좋은 것으로 되어 있고, 좁쌀을 재료로 하여 만든 소주도 사용된다 성의를 다한 제의에는 역시 좁쌀 청주가 없어서는 안 된다

떡의 재료는 쌀, 메밀, 조이고, 보리떡은 가끔 만드는 일이 있어도 제일 하등품으로 취급되고 제물로 올리는 일이 별로 없다

이처럼 조의 제물을 중요시 하는 관념은 조 농사가 오래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보인다.

 

(4)풍작을 기원하는 무속의례에서 조농사 과정이 모의적으로 실연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무속의례는 대부분 농경과 유리되어 있고 풍농의례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데, <세경놀이> 라는 풍농의례는 자주 실연되고 있다. <세경>은 농신의 명칭이고, <놀이>는 놀다의 명사형으로 연극적으로 실연되는 무의를 가리킨다. 세경놀이 풍작 과정을 연극적으로 실연하는 巫儀이다.

이 무의는 종합무제라 할 수 있는 큰굿의 한 제차로 행해진다. 배역은 수심방(首巫) 한 사람, 여자로 분장한 소미(小巫) 한 사람, 악기를 치는 소무 세 사람이 필욯며 도구는 무구 이외에 낫과 호미 그리고 병이 하나 필요하다

의례는 우선 수심방이 등장하여 옥황상제 이하 여러 신들의 제의가 끝나 농신을 위한 세경놀이 순서가 되었음을 고하는 내용의 노래부터 시작된다. 이 노래가 끝나면 여자 복장으로 분장한 소무가 등장하여 '아이고 배여 아이고 허리여!" 하며 배가 몹시  아파하는 시늉을 한다. 이 소무는 병을 배에 감아 묶어 숨겨서 배가 불룩하게 불러 있다. 수무,악무들은 이 여성과 대화를 교환하면서 배가 아픈 원인을 밝혀 간다. 원인은 점을 친 결과 임신 때문임이 밝혀진다. 들판에서 어떤 건달을 만나 임신한 것이다. 심방들은 해산달이 되었다 하여 분만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배에 묶어 두었던 병을 낳아 놓는 것이다. 낳은 아기는 사내아이여서 <팽돌이> 라 이름붙인다. 연극은 이 아이를 키워서 공부시키는 장면으로 나아간다. 하늘천 하면 밥밥  따지 하면 밥밥 이렇게 하여 아무리 공부를 시켜도 공부를 못하므로 '이 놈은 농사나 지어 밥이나 잘 먹을 놈이다 ' 하여 밭을 하나 빌어 농사를 시키기로 한다.

심방들은 밭을 빌어 경작하는 장면을 전개해 나간다. 웃ㄴ 풀과 가시덤불을 베어 불사르고 쟁기로 밭을 갈아 흙덩이를 부순다. 그래서 좁씨를 뿌려 말떼를 몰아넣어 밭밟기를 한다. 조는 싹이 잘 나서 커가므로 김을 멘다. 조는 삽시에 잘 자라 이삭이 펴고 풍작이 된다 심방들은 이 조를 거두어서 마소에 실어 집까지 운반하고 탈곡하는 장면으로 실연해 간다. 탈곡해 보니까 수확량은 엄청난 것이어서 지금까지 빚을 내 쓴 돈을 다 갚고도 조는 아직 산만큼 남았다. 이조를 고팡(庫房)으로 날라다 저장하는 과정을 실연하고서 풍농 흥부를 점쳐 의례는 끝이 난다

 

이 유감주술적(類感呪術的)인 농경의례는 조의 풍양의례(豊穰儀禮)임에 틀림없다. 보리나 쌀의 경작과정을 모의적으로 실현하지 않고 조의 경작과  풍작을 실현하는 것은 조농사의 오랜 역사와 그 중요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5)남성의 마을제에 조농사의 풍작과 관계 깊은 제의가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의 마을제는 남성의 마을제인 포제와 여성의  마을제인 당굿이 병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유교식 제법으로 행해지고 있고, 후자는 심방에 의해서 무속식 제법으로 행해진다. 한 마을에 남성의 유교식 마을제와 여성의 무속식 마을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구조적 마을제가 형성된 것은 그다지 오랜 것이 아니다. 원래는 남녀가 같이 무속식 마을제를 행하고 있었는데, 유학교육이 남성 사회에 보급됨에 따라 점차 유교식 마을제가 남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남성의 마을제인 포제에는 <정포제> 와 <농포제> 가 있다. 정포제는 음력 정월의 첫 정일(丁日)이나 亥日에 포제단에서 행해지고, 1년 중 마을 사람 전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농포제는 음력 7월의 첫정일 또는 해일에 행하는 풍농의 제의이다. 제의의 대상은 ,포제지위>로 신구사항을 한문의 축문으로 기원한다. 그 한 예를 보면 " **... " (생략)등과 같이 기원하는 것이다.

어느 마을에서도 조의 풍작만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제이이 조가 싹이 나고 성장하는 시기인 것을 생각하면 조를 중심으로 하는 잡곡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의임에 틀림없다.

 

(6) 또 하나, 조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을제라 보이는 것에 제석제< 帝釋祭>가 있다 이 제의는 1940 년대까지 주로 남제주군 성산면 일대에서 행해져왔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성산읍의 각 마을의 전승에 의하면 이 제의는 '제석동산'이라는 마을 가까운 곳, 조금 높은 언덕에서 행했다. 제일은 조를 파종하기 직전 또는 직후에 택일을 하여 행하는 마을도 있고, 음력 7월 14일로 날짜가 정해져 있는 마을도 있다. 어느 경우나 제관은 마을의 하인이다. 제일의 택일은 마을의 우도머리인 향장(향장제도가 없어지자 이장으로 바뀌었음)이 하고 하인에게 제석제를 행하도록 명한다. 그러면 하인은 마을 집들을 돌면서 제의를 행하는 것을 알리고, 각 가호에 헌납하는 잡곡을 모아 제물을 준비한다. 제물은 쌀메, 떡, 생선, 과일 감주 등인데 쌀메는 솥을 제장에 운반해 가서 그 곳에서 불을 지펴 짓고, 솥째 제단에 올린다. 신체는 백지 한 장을 잎이 푸른 대에 묶어 매어 깃발처럼 세운 것이다. 촌노들에 의하면 이 제의는 조, 메밀 등의 해충을 제거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것이라 한다.

 

이 제의의 제장인 ,제석동산이라는 지명은 도내의 거의 모든 마을에 보인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도적으로 행하고 있던 제의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향장이 택일을 하고 향장의 지시에 의해 하인이 제관이 되어 제의를 행하는 것도 원래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원래는 마을의 장 또는 유지가 제관이 되어 마을제로서 행하고 있던 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격하되고 하인에게 맡기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것은 이 제의가 아주 오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는 것임과 동시에 조 농사가 매우 오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 무속 마을제인 <마불림제>와 <시만국대제>는 조의 풍양의례(豊穰儀禮)와 관계가 깊다.

 

제주도의 무속 마을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의 의해 운영되고 시망이 제의를 집행한다. 제일은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나 일반적으로 음력 정월의 신과세제(新過歲祭), 음력 2월의 영등제가 있고, 또 위에서 말한 마불림제아 시만국대제가 있다. 신과세제(新過歲祭)와 영등제는 지금도 행해지고 있어서 그 제의의 성격이 분명하지만 마불림제와 시만국대제는 이미 소멸하고 있어 분명하지 않다.

마불림제는 마을마다 다르지만 대개는 음력 7월 8일부터 15일 사이에 제일이 정해져 있다. 이 제의는 '곰팡이를 풀리는 제의'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는 학자가 있다(주:장수근의 책, 1973년). 이것은 "각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당에 보관하고 있는 신의를 장마가 끝나고 난 후 내놓아 곰팡이를 말리는 제의" 라는 민간 전승에 의한 성격 규정이다. 과연 '마'는 곰팡이의 의미가 있고, '불림'은 풀림의 의미가 있는 말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어원적 전승을 그대로 받아들여 제의의 성격을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마;는  곰팡이를 의미하는 동시에 장마를 뜻하는 방언이고, '불림'은 풀림의 의미가 있기에 '장마풀림' '장마 갬' 의 뜻이 담긴 제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제주도의 조 농사에 있어서 장마는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다. 제주도의 토양은 화산회토로 조를 파종하고 발아와 성장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 마소를 몰아 넣어 밭을 운동장 같이 밟아 단단하게 굳힌다. 이렇게 경작한 조는 비가 내리지 않으면 싹이 잘 날 뿐 아니라 성장도 좋다. 만약 조를 파종하고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내리면 발아도 나쁘고 성장도 나쁘다. 그래서 조를 파종한 후 잠시(15일 내지 20일) 비가 내리기 않고 조의 성장이 좋아지면 '마가지가 되었다'고 한다 마가지 라는 말은 '장마걷이'라는 뜻으로 장마가 갬 이라는 방언이기도 하다. 결국 장마 갬이라는 것은 조의 발아와 성장이 좋게 되었다는 ㅓㄳ이다 이와 같이 마불림제는 이 말뜻에서 보아도 조의 성장을 위한 날씨 조절의 의미가 있었던 제의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것으 제일에서 보아도 납득할 수 있다. 7월 8일부터 15일 사이라는 제일은 위에서 말한 제석제나 농포제으 제일과 일치한다. 이는 무속식 마불림제와 유교식 농포제나 제섲게가 모두 조의 성장의레라는 같은 성질의 마을제인 것을 추측하게 한다. 아마 무속식 조의 성장의례가 남성에 의해 농포제 제석제 라는 유교식 제의로 변형된 것일 것이다. 그것은 어떺든 마불림제는 장마를 걷는 기상조절을 기회하고 조 농사의 풍작을 ㅇ기원하는 의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생략

 

한편 보리 농사에 대한 의례를 보면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입춘날에 보리 뿌리를 뽑아 보고 그 수가 3개면 풍작 1개이면 흉작이라는보리 뿌리점의 습속, 정월 대보름날에 날이 맑으면 보리가 풍작이라는 예조(豫兆)등의 전승이 있고, 예전 입춘에 관민합동으로 입춘굿을 했는데 농경의 모의적 행위를 하고 끝판에 가서 보리 낟가리에서 보리를 뽑아다 보고 흉풍을 점쳤다는 전승이 있다. 그러나 위릐 보리 뿌리점이나 예조는 전국적인 것이어서 제주도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보리 농사에 대한 의례전승이 눈에 띄는 것이 적고 조를 중심으로 하는 주곡에 대한 의례가 지금껏 많이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조 농사 문화가 오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조 농사 문화는 조만이 아니라 메밀 피 밭벼 등의 잡곡을 동시에 재배하고 화전경작 기술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보인다. 위에서 인용한 당서 동이전의 그 땅에는 오곡이 나되 경작하는 데 소를 이용할 줄을 모르고쇠스랑으로흙을 고른다 라는 기사가 참고가 되는데 메밀 밭벼는 지금도 성하게 재배하고 있고 피도 극히 최근까지 산간마을 사람들의 주식물로서 재배하고 있었다. 또 화전경작의 전승은 그 흔적이 보이는 <케왓> 이라는 제도가 최근까지 있었다. <케왓>이란 <계밭(契田) 이라는 뜻의 말인데, 그 밭은 계원들이 공동공유하는 것이다. 기 밭은 들판에 있어 띠가 자라 있다. 계원들은 공동 노동으로 그 떼를 베어 분배하고 그것으로 지붕을 인다. 몇 년 후 그 밭을 게원수로 나누어 균분하고 개간하여 조 메밀 팥 밭벼등을 각자가 경작한다. 3년간 경작하면 작물이 결실이 나빠지므로 띠가 나도록 방치하고 계원 공동의 밭으로 하여 공동 노동 관리를 하여 띠를 벤다. 그래서 또 몇 년 지나면 개간하는 식의 윤작을 한다.

이 같은 조 농사 문화에는 어로가 중시되어 있다고 보인다 조 농사와 어르가 본래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영등제의 씨드림 행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 내일 또. 4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