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젖은 단풍나무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간 숲에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먹은 포플린을 쫘악 찢는 외마디 새울음,
젖은 숲 젖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라 생각했다 그때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라도 상처 하나쯤은 꼭 지니고 가기 마련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에 말없음표 같은 비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름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듯이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무언가 용서를 청해야 할 저녁이 있다
맑은 물 한 대야 그 발 밑에 놓아
무릎 꿇고 누군가의 발을 씻겨 줘야 할 저녁이 있다
흰 발과 떨리는 손의 물살 울림에 실어
나지막이, 무언가 고백해야 할 어떤 저녁이 있다
그러나 그 저녁이 다 가도록
나는 첫 한마디를 시작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발을 차고 맑은 물로 씻어주지 못했다.
봄 중의 봄
아침으론 미역국이 편하고 좋다고
그래 날마다 먹자고 아내와 마음 포갰다
미역이 일하는 사람 피를 맑게 한단다
고래도 새끼를 배면 깊은 바다
미역 숲부터 봐 둔단다
공사판 봄 중의 봄은 구정 사나흘 지나
터엉 텅 항타기 폭발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눈 녹은 밭고랑에 서둘러 씨알 넣듯 우리는
새 달력에 붉은 동그라미 하나씩 둘러 나아갔다
공장 잔업으로 더 늦은 아내가
스뎅 양푼 가득 맑은 물에
배배 꼬인 마른 미역 몇 오라기 담그고
새벽이면 더 멀리 가야하는 내가
먼저 촉수 낮은 부엌등 켰다
그림자 하나 기우뚱 시린 물에 닿자
화들짝 팽팽하다
그래 그래, 참 신기하기도 하구나
한줌 마른 미역이 깊은 밤 한잠 새
맑은 꿈 속 뒤채며 몸 풀고
이 아침 양푼 가득 파랗게 되살아나는 일
이른 봄 우리네 사는 일의
어김없는 물오름이여
달각대는 압력추의 장단만큼
적당한 무게로 출발하는
쾌조의 봄이여
벚꽃 터널-신탄진
이 벚꽃 터널 빠져나가면
그대 어느덧 반백은 되어 있으리
문득 뒤돌아보는 거기쯤
새로 막 태어난대도 좋으리
감아도 부신 눈 속 꽃잎은 눈발로 분분하고
한 번 떠나온 저곳,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음
세상 겨울을 거듭 지난다 해도 끝내 여기 이 자리
이렇게 뒤돌아볼 뿐이리니*** 바로 그때
그대는 마음의 문을 막 통과했으니
괜히 큰 소리로 아이도 불러보고
어깨 부딪친 이와 눈인사도 나누는 때
긴 겨울 뒤 짧은 봄은
끝내 여름의 무성함에 잇대진 길
거기 흰 꽃잎들 떨어져 늦은 깨달음처럼
오래오래 뒤채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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