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공지영 소설 도가니- 2009년의 책읽기 16

자몽미소 2009. 7. 11. 22:03

 

 

 

공지영이 쓴 글 중에 안 읽은 것도 많구나..

산문집도 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처럼 이 책 <도가니>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작가의 필력에 꼼짝없이 잡혀 단숨에 읽고 말았다. 작가가 반년을 쏟아 부어 만들어 낸 작품을 독자인 내가 오후부터 시작해 이른 밤 사이에 다 읽어 버렸다면 작가는 섭섭해 할까,

책을 읽고 나서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기록을 해 두려 했으나,  소설의 무진이 그러한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안개가 되어 머리 속을 희게 한다. 특별한 사색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래 고개 숙여 책만을 들여다 본 까닭일 수도 있다.

 

한동안은 공지영의 글들을 멀리하다가 <우리들의 행복한 순간> 이후로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우생순> 을 읽은 후로는 공지영이 말하는 것들이 산이 아니라 산맥을 이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로 그러했다. 작가의 <우생순>은  사람들에게 국가라고 해도 한 인간의 생명에 관한 권리가 있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하였다. 공지영의 그 소설이 나온 즈음부터 사람들은 국가가 가진 사형권이 과연 정당한가를 질문하고, 법의 남용되는 것을 우려하며 생명에 대한 경외를 깨달았다. 그것은 사형제도 폐지운동이 되었다. 범죄인이기 전에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소설 <도가니>의 말미, 작가의 말에는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 불의와 맞서 싸우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을 안 이후에 작가는 평화의 한 끝자락을 잡은 듯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숙한 나는 불의를 모두 버린 세상만이 정의의 세상이 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 <도가니>는  어쩌면 불의한 세상에 맞선 결과 정의가 이겼다는 내용이어야 즐거운 소설이 될 뻔했다. 그러나 그랬더라면  매우 미숙한 소설이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물방울입자가 모여 거대한 안개를 이루는 것처럼  불의라는 것이 저 혼자 커다란 덩치를 가진 것은 아니다. 소설에 나오는 무진의 사람들은 안개와 닮았다. 서로의 잘못을 눈 감아 주어야 서로 행복해지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 한 치 앞도 못 보게 하는 안개를 만든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지만, 늘 안개 속에 사는 사람( 이 소설 속의 장형사)들은 이미 훤하게 길을 보고 있다. 이 안개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자는  슬퍼지고 힘이 빠지고 도망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기어코 살아남고 이전보다 더 뻔뻔해진다. 소설의 결말은 어쩌면 정의의 실패처럼 보인다. 정의는 힘이 없고 불의는 힘이 센 이 세상의 이야기였으니, 정의는 불의를 이긴다는 믿음, 아니면 이겨야 한다는 상식은 보기좋게 배반을 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나온 것이다.

 소설은 불의에 맞서 싸우다 도망칠 수밖에 없던 한 남자와 그 남자가 보듬고 싶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 냄으로써 정의를 위해 일을 한 셈이다.    

 

책 뒤에 적은 작가의 말 중에서 엘뤼아르의 글을 옮겨 적는다

 

"미화된 언어나 진주를 꿴 듯 아름답게 포장된 '말'처럼 가증스러운 것은 없다. 진정한 시에는 가식이 없고, 거짓 구원도 없다. 무지갯빛 눈물도 없다. 진정한 시는 이 세상에 모래 사막과 진창이 있다는 것을 안다. 왁스를 칠한 마루와 헐클어진 머리와 거친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 뻔뻔스러운 희생자도 있고, 불행한 영웅도 있으며 훌륭한 바보도 있다는 것을 안다. 강아지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걸레도 있으며, 들에 피는 꽃도 있고, 무덤 위에 피는 꽃도 있다는 것을 안다. 삶 속에 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