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달과 6펜스- 제국주의적 낭만과 예술지상주의

자몽미소 2009. 7. 13. 11:39

 

 

 

책을 읽으면서야 고등학교 방학 숙제였던 이 책을 읽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았다. 책 뚜껑엔 2003년에 중학생이었던 아들이 읽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달과 6펜스의 책 제목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나는 이미 읽었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달과 6펜스라는 것은 예술과 현실을 비유한 것이야!" 라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억 한 자락에 박아 놓고는 오래 전의 내 독후감이 낡고 낡아지다가 한 올 실타래 처럼 저 문장 하나로 남은 줄로 알았다.

아마 고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읽고 독후감을 썼더라도 나는 책 뒤의 옮긴 이의 말을 베껴서 독후감 숙제를 했을 것이고, 다시 읽지 않았다면 저 책은 오로지 현실에 대한 예술의 고귀함을 표현한 문학으로 단정을 지은 후, 예술은 현실보다 가치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할 것이었다.

 

그러나 살아보니 그렇던가?

봄에 보던 것이 가을이면 모양이 바뀔 것을 미리 알게 되었고, 밥 먹고 자식 돌보기 위해 일하는 어른의 살이가 그닥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미장원 여성 잡지에서 알려준 성감대와 체위가 아무리 많더라도 오르가즘은 고작 몇 초간의 황홀일뿐, 신뢰를 바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버렸으니,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아줌마로 읽는 이 책의 독후감에 여학생 때의 순진한 마음을 가지고 예술의 위대성을 찬양할 수는 없겠다.  예술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소설을 쓰느라 애쓴 서머셋 몸에게  정말 노고가 많으셨다 정도의 인사는 할 수 있겠다, 고 이야기 한다면 물론 나는 6펜스 짜리 인생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되겠다. 사실 또 6펜스 짜리 인생이라해도 틀리지 않다. 나에게 달은 오지 않았고 나에게 달이 무엇인지 모르니.

 

폴 고갱의 삶을 소설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소설은 소설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음인지 실제의 그의 삶과는 다른 면도 많은 것 같다. 소설에서는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다는 방법으로 이중의 장치를 해 놓고서 스트릭랜드의 괴이한 성격, 갑자가 가족을 떠나 버리는 행위라든가 자기 때문에 자살한 여인에게 연민을 가지지 않는 행위를 설명하고 있다. 예술만을 온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인간에게 그 외의 감정이라는 것이 방해물이 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독자로서는 그런 인간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작가는 자기 자신도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음을 털어 놓음으로써 독자들을 그의 편으로 이끈다.

독자는 스트릭랜드가 보여주는 일체의 행동을 예술가의 어쩔 수 없는 광기로 이해하고,  그의 괴이한 성격도 예술을 위한 열정 때문에 생겨난 어쩔 수 없음이라고 믿는다. 그는 곧 위대한 예술을 창조할 사람이라는 기대를 소설 책을 잡으면서 하였으므로 독자는 그런 기이한 성격을 이해 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속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 예술가 때문에 몹시 난처한 일들을 겪게 된다. 부부간 서로 갈등할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전혀 드러내지도 않다가 갑자기 떠나 버리는 바람에 아이 둘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진 부인은 물론, 그의 예술성을 알아보고 잘 대해주려는 맘씨 좋은 스트로브는 그에게 그림 그릴 공간 까지 빼앗기고 아내마저 잃는다. 그러나 이 예술가는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그림만이 소중하고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그림 이외의 다른 것에 빼앗기기도 싫어한다. 

실지로 폴 고갱은 증권시장의 붕괴로 일자리를 잃었고 그 때문에 부부갈등이 심해지자 부인이 그를 떠나버렸다. 그후 고갱은 공사장 인부로 일한 적도 있다.  그후 타이티로 가서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영주하지만 심장병과 매독 등의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삶은 작가가 만든 스트릭랜드보다 더 어렵고 힘들었다고 느껴진다. 작가는 실지의 고갱보다 더 극적인 인물, 거기다 낭만의 색채를 입혀 예술에 대한 지위를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서머셋 몸이 활동하던 시대가 한창 전쟁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속에 전쟁의 흔적을 볼 수 없고 고작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와 훈장을 받은 친구를 환대해 주었다는 정도 밖에는 언급이 없다.  시대의 상황에 침묵하던  그의 문학적 경향은 그 당시에도 평단의 비평을 받았지만 그는 '문학은 문학으로서 예술이어야 한다'는 견지를 고수하려 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폴 고갱의 삶을 스트릭랜드의 삶으로 바꾸면서 굳이 예술이 겪는 불운에 독자들이 동정을 하도록 힘썼던 것이다. 

 

그리고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소설 속에 나오는 여성에 대한 발언, 원주민에 대한 묘사이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자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는 스트릭랜드가 그녀들을 떠나고 버리는 것을 이해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내용이었을까, 여성을 슬프고 힘들게 하는 일에 대한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양심이 없더라도 작가 자신, 예술은 그것들을 상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소설의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비정함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은 스트릭랜드의 말은 곧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니, 100년 전의 그는 인권이나 여성성에 대해 오늘날과 같은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질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또 하나는, 프랑스와 영국을 자유롭게 오가는 소설 속 화자의 일이 무엇인지 독자는 도대체 모르는 것이다.  그는 가끔 일 때문에 바다를 건너기도 하고 글을 쓰느라 시간이 없기도 하였다는 표현을 쓰지만 그가 이 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 독자로서는 알 수 없다. 화자는 노동자는 절대 아니고 유산 계급자였던 것 같다.

그의 밥과 차비와 결혼 여부, 자식의 유무, 직업상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야 소설을 위해 모두 생략해야 하는 게 소설 속 장치라고 해도,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닌 소설을 읽으며 소설의 화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독자로서는, 그저 화자가 말하는 대로 모두 믿고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트릭랜드는 타이티 섬에서 행복한 시간을 살다가 죽었다고 화자는 전한다. 

타이티 섬에 관한 언급, 그 섬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화자 또는 작중 인물간의 대화를 보면, 흰 피부 색깔의 사람들이 검은 피부의 토착민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된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만들어 제국을 넓히던 때,  스트릭랜드도, 또 고갱도 이 소설의 화자도, 이 소설의 작가도 모두 타이티를 찾은 것이다. 이 땅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공간으로서 마침내 고향을 만나게 된 사람들이 정착하는 곳이다. 그래서 백인인 제국의 사람들- 부뤼노 선장, 타이레, 의사는 이 섬에 눌러 앉게 된다. 토착민 여자들은 백인을 아주 좋아하므로 스트릭랜드는 쉽게 그곳에서 여자를 만날 수 있었고 그가 그림만을 위해 살 수 있는 숲 속 타라바오로 들어가 토착민 여자인 아타와 산다. 그는 오직 물감과 담배와 돈이 필요할 때만 마을로 내려온다. 그는 일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그림만을 그릴 뿐이다. 

 원초의 땅 같은 섬에 들어가 고향과 같은 안온하고 풍성한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는 설정은 순전히 제국주의자의 낭만이다. 태평양의 섬에 대한 묘사는 제국의 백성이 식민지의 땅을 제 것으로 취한 후 들이부운 낭만의 물감이다. 원주민들은 제국민들이 들어와 자기 땅을 고향이라고 여기는 그들을 어떻게 느꼈을까, 물론 소설은 그런 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고, 서머셋 몸이 이 소설을 쓸 때만 해도 제국이 식민지를 차지하는 일은 자연스런 세상 일이었다. 원주민은 그저 그 땅의 자연의 일부였을 뿐이다. 스트릭랜드가 자기 그림에 그려 넣은 원주민 여자들처럼, 그림의 재료로서, 아름다움을 말한다면 그들을 그려 넣은 예술가의 그림이 위대한 것이지, 그림 속의 원주민이 아닌 것이다. 서머셋 몸이 상상하는  아름다움도 원주민이 자연의 일부로서 녹아 있을 때이지 사람으로 존재할 때 비롯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런가 스트릭랜드와 살았던 아타를 묘사할 때, 아타는 우직한 원주민의 표상이 두드러진다.  어쩐 일인지 그 괴이한 성격의 스트릭랜드는  그 섬에서 원주민들에게서 사랑받았다고 전하는데, 이 이야기 또한 제국주의자의 믿음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미개한 원주민들이 어찌 그 예술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믿음.

 

어떤 이를 일컬어 "그는 시가 삶이었다" 하는 것보다는 "그의 삶이 시였다" 라고 하는 편이 훨씬 가슴을 울린다. 어떤 맹목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열정으로 변해서 한 사람의 일생을 떠받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가슴에 열정을 품은 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도 나는 예술합네 하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행태에 꽤나 불편해 한다. 내 안목이 짧아 그가 보여주는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그럴 것이다 십분 양보하면서도 '체' 하는 사람을 보면 체에 걸린 듯 할 때가 있다.  

물론 이 소설의 스트릭랜드는 치열하게 살았고 그다지 변명이 없었으므로 예술합네 하는 사람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나는 사실 소설 속 이 예술가에 감동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감동을 준다면 우여곡절이 나름 이해가 되는 폴 고갱의 실지 삶이겠다. 그의 일대기를 좀 더 솔직하게 보는 편이 폴 고갱을 낭만적으로 그려보려던 이 소설 보다 나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전시회를 보러 가도 그림보다는 사진을 좋아하고, 풍경 사진 보다는 인물 사진을 더 좋아하는 내 취향이 이 소설을 폄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달을 품는 소녀에서 6펜스라도  손에 돈을 쥐어야 안심하는  일반적인 노년층의 표본처럼 되어 버린 게 확실하다. 세계 명작을 읽고 나서 싫은 소리를 좀 하고 나더니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또 체세꾼 자세다. 이러니 나이 들어가는 거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오래전 했다고 믿은 방학숙제를 진짜로 마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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