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민족지연구 제 10강

자몽미소 2009. 11. 15. 04:44

 

 

 

 

 

 

문화인류학 제 10강




한국학과정 KMJ

(2009. 11. 16 화)




1.송도영의 서울 읽기-공간의 낯설음과 생경함, 길에게 묻다.


글 색깔이 매우 다른 바람에 이 책의 저자가 『인류학과 지방의 역사』에서 서산지방의 <생활공간과 교통> 편을 쓴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비교적 쉽게 읽히지만, 1부의 글과 2 부의 글 무게나 스타일이 또 달라서 책 한 권을 읽고도 두 세 권쯤을 읽은 것 같은 기분도 들게 하였다. 1 부에서는 강남,  지하철, 방 문화, 코엑스몰, 예식장에서 속도라는 속성을 꺼내 보였고, 2부에서는 가회동, 양평군, 청계천 공구 상가를 들여다보며 스러져가는 역사에 대한 안쓰러움과 행정의 불합리를 보여 주었다.

<서울 읽기>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이 인류학자는 어떻게 서울을 보여주려 하는가 궁금했다. 서울과 먼 섬사람으로 살면서 나에게 서울은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방송에서 보이는 세련된 서울 사람을 동경하고, 상경의 수단으로 대학 입학을 생각했으며, 서른 무렵까지도 이 섬을 탈출하는 방법으로 서울로의 이직을 공상했었다. 그러는 동안 나에게 이미지화된 서울의 공간은 차츰차츰 변하였고, 그 공간에 대한 동경은 두려움으로 바뀌어갔다. 어떻게 하면 서울에 갈 수 있을까 하던 고민이 서울에 안 사는 게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때쯤, 서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기반을 들고 와 버린 남자는 적극적으로 서울과 멀어지는 사람이었다.

송도영의 서울 읽기는 지방민인 내가 서울에 대해 막연히 생각하거나 오해 했던 것과는 달리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 서울 사람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생경하고 낯선 도시, 그가 매일 겪어 내고 있는 일상공간에 대한 관찰과 성찰을 글로 풀어낸 것이다.

“깊은 경험과 추억이 배어 있을 법한 기억의 공간들을 찾아도, 그 공간들의 외형이 그대로 있는 곳이 없다. 그 냄새가 그대로 있는 곳이 없고, 그곳의 사람들이 그대로 살고 있는 곳이 없다.… 우리들도 어느 한 자리에서 진득하니 자기 일상의 기억과 느낌들을 푸근히 담지 못한 채 공간의 낯설음을 넘나들고 있다”(p8 서문)

그런데 이 글을 다 읽고 나니, 저자의 고민이 고스란히 내가 겪는 제주도와 겹치는 것을 느낀다.  강남을 읽을 때는 한라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중심으로 한 연동 신시가지 학군을 떠올렸다. 연동 신시가지의 집과 아라동 우리 집은 같은 평수인데도 가격이 현격한 차이가 나고, 어떤 친구는 이렇게 구석진 데서 살고 있냐며 핀잔을 하기도 했었다.  학교 교사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나 그곳에 살고 있는 학부모들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아이들의 교육에 열과 성을 다 한다며 제주도의 연동 신시가지는 서울의 8학군이라는 말도 하였다. 그러니 서울 사람들의 강남과 강북의 차이는 몇 십 배의 차이일 것이라고 짐작을 해 본다.

가회동 편을 읽을 때는 성읍민속마을 보존에 관해 행정이 벌이는 일과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고충, 관광객들의 기대 같은 것을 함께 생각하게도 되었다.  물론 청계천 공구 상가의 역사와 생태복원 편은 산지천이 복개되고 복원되던 때의 무수한 담론들이 생각나서 이 글을 모델 삼아 제주도 읽기를 써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시사회학을 연구하여 그런지 저자는 이 책에 거론된  몇 개의 공간에서 <길>을 보고 있다. 지하철은 서울의 공간을 몇 킬로 미터 라는 직선 거리의 개념에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 개념으로 갈라 놓고 통합한다고 보았다. 지하철을 타는 동안 서울 땅 위의 지형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지하철 역이름으로서만 서울 한 부분의 공간 표시를 하고 지하철 역과 역 사이에 걸리는 시간만이 이용자들에게 중요하게 기억될 뿐이다.

코엑스몰은 돌아다니는 길의 교차방식을 조절하고, 소비자를 유도하는 장치들을 배열하는 인위적인 공간이다.  성격이 다른 여러 업종들이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길로 연결되고, 다양성 속에서도 문화적 기호를 통일 시킨다. 이를 통해 다른 계층이나 직업군, 연령층, 다른 사회 구성 집단과 만날 기회를 최소화시켜 버린다. 서로 소통하여야 할 길이 차단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청계천 공구상가는 해방 후 자생적으로 생겨나 나름의 생명을 갖고 있던  공간이었다. 공구의 골목길엔 공구상가의 사람들에게 일상의 삶을 보조하는 공간으로 밥집과 낡은 여관들이 함께 생겨났고 정돈되지 않은 듯 하면서도 그 내부에선 자체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옛 물길을 찾는다는 명분하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책을 덮은 이 시간에도, 또 내일과 모레, 내년과 10년 후에도 서울은 지칠 줄 모르고 변하고 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발붙이고 선 이 땅덩이를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면 서울은 어떤 기관일까, 그리고 서울을 가르고 묶는 길은 또 무엇일까, 나는 일찌감치 입성하지 못하였으나 나와 동시대를 사는 그곳의 사람들은 지방 사람인 나와는 다른 속도감을 갖고서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그곳, 그러니 서울 읽기 또한  매번 읽어내야 할 것들이 발생할 것이다. 어느 날엔가는 강북이 강남보다 좋은 땅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날엔 사람들의 욕망이 바뀌어 더 이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공간일 수도 있겠다. 달에 물이 있어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뉴스가 나오니 하는 공상이지만 <다시 쓰는 서울 읽기>가 나올 때쯤엔 달나라로 가는 길을 만들어낸 후일 수도 있겠다.


2. 김현미의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소비되는 몸의 세상


- 책 중에서 꺼낸 저자의 말-


“문화번역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의미있는 해석을 만들어 내는 행위다.… 그러므로 문화번역자가 된다는 것은 불완전하지만 불가피한 창작의 행위지가 된다는 의미다.”-(p9)


‘글로벌’의 이미지는 국가 경계 밖에 있지 않고, 한국 사회의 외국인 마을이나 이산 동네에서도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상징 체계를 가진 문화들 간의 의미 있는 소통을 위해  문화번역자는 권력 관계를 매개하고 강화하는 행위자가 되며 그들의 삶의 경험과 자원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1,2장)

그러나 글로벌 자본주의는 개인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인종, 계급, 국적 등의 ‘차이’를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빈곤화화 이주의 여성화 현상이 심각해진다. 다국적 기업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첨병이며, 문화 교차지역으로서 자본이 움직임에 따라 지역의 노동자들은 의도하지 못하던 변화를 겪는다. 또한 한국에 온 외국여성들은 한국식 접대 문화에 갇히고 저항한다(3,4,5,6장)

글로벌 시대는 이미지와 욕망이 유동하고 생성되는 시대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사람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이 글에서는 월드컵에 열광하던 한국 여성들과 일본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한국 사회, 한류를 소비하는 대만과 일본의 여성들을 그 주체로 본다( 7,8,9 장) 


  - 책 밖의 내 생각-

저자는 “한국을 현장으로 삼은 페미니스트 문화 인류학자로서 남성 중심, 서구 중심, 엘리트 중심의 문화 권력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면서 한국 사회를 번역하였다”(P 9)고 하고 글로벌 자본주의가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 “인종, 계급, 국적 등의 ‘차이’를 활용” 한다고 적었다.

미국계 전자조립 공장에 취업한 한국 여성의 노동쟁의를 다룬 글에서는 “아줌마”가 등장했는데 이 아줌마들은 욘사마 열풍에 휩쓸린 일본 아줌마들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읽혔다. 여기서 그들을 가르는 건 무엇인가?

저자는 한국의 드라마가 아시아 여성들 간의 소통 양식을 새롭고 만들고 구성하는 지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여 말했지만  미국계 다국적 기업 M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아줌마들도 한국 드라마의 팬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일본 아줌마들과 한국인 노동자 아줌마들은 “드라마” 라는 매개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소통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계급으로 갈린다. 돈을 받으러 미국까지 데모하러 가는 한국 아줌마와 욘사마 열풍에 휩싸여 일본 땅을 떠나는 일본 여행자는 서로 다르다. 드라마가 아시아 여성들간의 소통양식을 새롭게 한다는 말은 그래서 공허하게 들렸다. 같은 드라마라고 해도 각각의 나라 여자들이 누리는 방식, 소비하는 방식이 다르고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공유할 수 있는 어떤 여성 집단이 한국에 있고 일본에 있고 대만에 있는 것이지, 한국의 여성 노동자까지를 모두 포함시키지는 않기 때문에 아시아 여성이라는 큰 카테고리로 묶는 것은 독자를 불편하게 하였다. 특히 나는 그들과 친해질 마음이 없고 소통을 하게 될 거라고 믿지 않는 아시아 여성이기 때문이다.

내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욘사마를 소비하는 일본 여자들의 행동을 보면, 뭐 저렇게까지 할 게 있담?  싶어서 하나에 빠져들면 끝까지 파고 드는 국민성 때문인가도 생각해 봤다가 드라마를 갖고 이야기를 나누기 보다는 같이 놀 게 없다고 지레짐작을 하여 버렸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는 이 글에서 새로운 소통 양식을 구성하고 있다하니, 글을 위한 글이 아닌가 싶어진다.


그 외, 문화번역자에 대한 혼동이 생겼다.

어떤 장에서는 현장에서 관찰하고 성찰한 것을 가지고 글을 쓰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문화 번역가로 지칭했다가, 다른 글에서는 한국에 취업했던 러시아 여성이라든가 한국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들을 들어 문화 번역자로 말하였다. 그래서  문화 번역가의 자질에 관해 언급할 때 그런 당위는 저자와 같은 인텔리에게는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들의 자질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인가 의아했다.

 

저자는 한국의 여성노동자와  결혼 또는 서비스업 종사자로 한국에 들어오는 이주여성, 한국의 드라마에 열광하는 일본여성 팬들과 일본 문화에 심취한 일본 매니아들이 가졌던 자기 정체성에 관해, 그리고 그들이 저항하거나 새롭게 깨달았던 것들에 보다 애정을 갖고 접근하였기 때문인지 그들이 문화 접경지역에서 가지게 된 변화를 긍정적인 모색의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이 세상이 글로벌화가 심화될수록  연대와 소통보다는 또다시  새로운 구별을 만들 것이라고 여겨진다.  책을 덮으며 나는 타지 또는 내지에서 몸만이 자본인 여자( 이주 여성, 다국적 기업의 여성 노동자)와 다른 나라의 남자를 소비할 수 있는 여자들( 한류에 몸을 실은 여행객, 일본 매니아) 로 서 이 책 속의 여자들을 보았고, 이 두 집단이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으로 "차이"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아시아에 살고 있다고 해서 아시아 여성들이라고 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