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신화와 의미-2009년의 책읽기

자몽미소 2009. 11. 15. 04:48

 

 

 

 

 

 

  책에서 옮기다

<<토테미즘>>과 << 야생의 사고>>에서 제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오로지 굶어죽지 않으려는 욕구와 가혹한 물질적인 조건 속엣 살아 남는 데에만 매달린다고 알려진 이런 사람들이 철저하게 공평무사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세계를 이해하려는 욕구 또는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래 그들은 어느 철학자 또는 어느 정도까지는 여느 과학자가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적인 수단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이것의 저의 기본 가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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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흥미를 끌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자신의 정신적인 힘 가운데에서 일정량을 사용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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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천연 자원에 대해 엄청나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단지 얼마 되지 않는 영역만을 사용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이 작은 영역은 문화마다 서로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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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과잉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자 하는 경향입니다. 하지만 문화가 진정으로 문화 그 자체가 되고 무엇을 생산하려고 한다면, 문화와 그 문화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독창성을 상실한 채, 세계의 어느 곳을 가든지 모든 문화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소비할 수 있는 유일한 소비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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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부터 남풍을 길들이고 지배하려고 했으며, 마침내는 그에 성공했던 홍어에 대한 서부 캐나다 신화를 생각해 볼까 합니다. 이 신화는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기 이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동물과 인간이 사실상 구분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모든 존재는 반인반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바람 때문에 몹시도 고통을 받았습니다. 바람들, 특히 개중에는 못된 바람들이 사시사철 아무때나 불어와, 사람들이 해변에서 조개를 줍거나 낚시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바람과 싸워서 바람이 좀더 점잖게 행동하도록 만들기로 했습니다. 홍어를 포함해 여러 반인반수들이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홍어는 이 원정에서 남풍을 사로잡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남풍은 사시사철 아무때나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씩 특정한 기간에만 불어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풀려났습니다. 그 후로 남풍은 한 해 가운데 특정한 기간 동안만 불거나 하루 걸러 한 번씩만 불어왔습니다. 따라서 그 나머지 기간 동안 인류는 맘껏 활동할 수 있게 된 것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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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홍어이고, 남풍일까요.

신화적인 제제를 이야기된 그대로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홍어가 매우 정확한 특성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홍어의 특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특성은 모든 납작한 물고기가 그렇듯이 아래쪽은 미끈거리고 등쪽은 거칠거칠한 물고기라는 사실입니다. 홍어의 또다른 재능은 다른 동물들과 대항하여 싸워야만 할 때 매우 성공적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나 아래에서 보면 무척이나 넓고 크지만, 옆에서 보면 지극히 얇고 가늘기 때문이죠. 상대는 홍어가 넓적하고 크니 화살을 쏘아서 홍어를 죽이는 것이 아주 쉬울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화살을 겨냥하는 순간, 홍어는 갑자기 몸을 돌리거나 살짝 빠져 나가 자신의 옆면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 옆면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홍어는 위기를 모면합니다.

따라서 홍어가 선택된 이유는 첫번째 관점, 또는 두 번째 관점에서 고려해 보건대, 오직 "예", 아니면 "아니오" 라는 대답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홍어는 단절된 두 가지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데, 하나는 긍정적인 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상태입니다. 신화 속에서 홍어를 도입한 것은 현대의 컴퓨터가 일련의 "예와 아니오" 대답을 추구함으로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고기가 바람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경험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또한 불가능합니다. 반면 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경험에서 빌려온 '이미지'가 왜 사용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화적인 사고가 가지는 독창성입니다. 즉, 관념적으로 사고하게 하는 것이지요.

 

논리적으로 이항 대립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적용할 수 있는 동물은 이항 대립적인 문제와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풍이 일 년 내낸 날마다 분다면 인류에게 생활은 불가능합ㄴ다. 하지만 하루 걸러 하루씩만 불어온다면 인류의 욕구와 자연계를 지배하는 전제조건 사이에 일종의 타협이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홍어 같은 동물과 신화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의 유형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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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현재의 과학적인 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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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삶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과 근본적으로 , 실질적으로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믿게 된다면, 그리고 인류와 그 밖의 다른 모든 생물체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뛰어난 지혜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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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은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제가 매순간마다 방금 전에 들었던 것과 지금 듣고 있는 것을 결집시키면서 음악의 총체성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어떤 교향곡도 이해 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교향곡에서 어떤 음악적 즐거움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언어, 신화, 음악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언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편에 있는 음악과 다른 한편에 있는 신화, 이 둘은 모두 언어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진행하면서, 음악은 언어 속에 이미 깊이 간직돼 있는 소리의 측면을 강조하게 되죠. 반면, 신화는 지각의 측면, 곧 의미의 측면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이미 언어 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제와 변주에서 음악적인 공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각각의 변주에서 처음 들었던 주제를 기억할 수 있을 때라야만 그 음악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 들었던 곡의 변주 위에다 다른 변주를 무의식적으로 겨벼놓을 때 각각의 변주는 그 나름의 맛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음악을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나 또는 신화적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일종의 연속적인 재구성이 일어납니다. 단순히 전체적이 유사성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바흐 시대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된 푸가가 어떤 특별한 신화의 작용을 그대로 빼박은 듯이 재현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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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합에 의한 신화적인 해결책은 그 구조상 음악 작품을 마무리하고 해소하는 화음과 매우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이 화음들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회하고 있는 양극단의 것들을 결합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음악 형식은 음악이 실제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신화의 구조에서 무의식적으로 빌려온 것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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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언어를 비교한다는 것은 지극히 미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아주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시대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기본적인 요소를, 음소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음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서로 결합함으로써 의미를 분화시킵니다. 음악에서는 음표가 이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음표는 단지 음표일 뿐이지만 이런 음표가 결합됨으로써 비로소 음악은 창조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에서 기본적인 재료로서 음소를 가지고 있다면 음악에서는 음조소 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사성입니다.

하지만 언어에서 다음 단계 또는 다음 수준을 생각해 보면, 음소들이 결합되어 단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러나 음악에는 단어가 없지요. 음표가 모여서 악구가 됩니다. 따라서 언어에는 세 가지 분명한 단계( 음소-단어-문장)이 있지만 음악에는 단어를 바로 건너뛰어 문장으로 나가게 됩니다.

신화를 음악과 언어 모두와 비교하면서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도 있습니다. 신화에는 음소가 없습니다. 신화에서 가장 작은 단위는 단어죠. 한편 언어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면 첫째는 음소, 둘째는 단어, 셋째는 문장입니다. 우리는 음악에서 음소과 문장에 상응하는 것을 찾을 수 있지만 단어에 상응하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신화에는 단어와 문장에 상응하는 것은 있지만 음소에 상응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경우 모두 단계 하나가 실종되어 있는 셈입니다. 

 

언어가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 곧 한편으로는 소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제시한 사람은 다른 아닌 페르디낭 드 소쉬르였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인 로만 야콥슨은 <소리와 의미>라는 작은 책을 얼마 전에 출판했습니다. 소리와 의미는 분리될 수 없는 언어의 두 얼굴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를 표현할 소리가 없다면, 어떤 의미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언어가 음악에서 넘겨받은 것은 소리 요소이며, 신화에서 넘겨받은 것은 의미 요소인 것입니다.

 -2009년 11월 15일, 새벽에 옮겨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