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채털리부인의 연인 1,2

자몽미소 2010. 1. 30. 17:28

 

 

 

 

책을 읽고 내 생각

 

이 책의 제목으로 읽기 전에는 책의 제목을 <채털리 부인의 사랑 > 이라고만 알고 있었고, 그것도 책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제목으로 알고 있던 터여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행각이 책의 주요 내용일 것으로 오해했었다. 그러나 막상 책 속에선 채털리부인인 코니의 생각 보다는 그의 연인, 멜러즈의 가치관과 생각이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멜러즈와는 매우 대조적인 인간으로서 클리퍼드 경이 나온다. 클리퍼드 경은 테버셜 탄광의 실질적인 소유자이자, 생명의 기운을 석탄과 탄갱으로부터 느끼며 수천 명의 광부들을 지배하는 힘을 느끼려는 사람이다.  멜러즈는 자본가 클리퍼드 경에게 주 당 얼마를 받음으로써 그에게 경제적으로 속한 사람이고, 맬러즈의 노동력은  클리퍼트 경의 사유재산지에서 사냥터지기로 쓰이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들고 읽고 있던 중이라, 작가는 채털리부인의 연인, 멜러즈의 입을 통해  남녀는 물론 계급간에도  "부드러운 소통"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멜러즈에 따르면, 땅에 발을 딛고 노동하는 인간, 자연과 어울리고 거스르지 않는 인간, 진정한 애정을 알아보고 거기에 부응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자유로운 삶을 사는 인간으로 본다. 그 점에서 멜러즈를 고용한 클리퍼드는 스스로 서서 걸어다닐 수 없으며, 명성과 성공을 지향하는 그가 기대고 있는 바는 탄광이라는 자본이고, 그의 욕망은 석탄을 이용해 다른 산업을 일으켜보려 애쓰려 하기에 그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를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작가는 지배 계급, 자본가의 위치에  클리퍼드를 놓고, 몸으로 노동하는 인간의 위치에 맬러즈를 배치시키면서 이 두 집단의 사고 방식과 가치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채털리부인인 코니가  인간다운 소통이 가능한 맬러즈의 품으로 들어감으로써, 또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함으로써 어느덧 소설은 지배계급의 속물성에 대한 노동계급의 자유로움이 승리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코니가 몸과 마음을 완전히 멜러즈 쪽으로 방향 전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네 힐더는 관념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을 위한다고 사회주의자로 생각하면서도 두 계급이 서로 삶의 리듬이 다르다고 판단함으로써 반쪽의 자유를 얻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와의 소통이 무엇인지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여자가 되고 만다.  그에 비해 볼턴 부인은 노동자의 부인으로서 자본가의 산업현장에서 남편을 잃음으로써 자본가 계급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 계급을 동경하고 동시에 경멸하며 살아간다.  멜러즈와 클리퍼드 경이 계급 선의 양쪽 방향에서 완전히 서로 다른 삶을 지향하고 멀어지는 동안, 코니와 힐더, 볼턴 부인은 자신이 갖고 있던 성향을 감추거나 드러내며 두 방향의 남성과 관계를 깨거나 더욱 공고히 만들어가고 있는 게 이 소설의 흐름이고 저변이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특별한 재미는 멜러즈와 코니의 성이 무르익는 동안 발생하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과 풀어짐이라든가 볼턴 부인과 클리포드 경의 성인과 유아식 관계 맺기가 아닐까 싶다. 멜러즈와 코니의 성애묘사는 오르가즘을 설명하는 다른 어느 책에서보다 길고 화려해서 20세기 초의 출판업계에서 금기처분까지 받은 원인이 되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래서 도대체 이 책의 성애장면이라는 것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이 되었는지 궁금해지면서, 언어로 표현한 성이 보여주기의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 가능 했겠는가도 싶다.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마르크스를 읽는 동안, 마르크스가 염려하는 자본의 힘을 염려하는 동안, 그가 말한 노동의 소외에 동감하는 동안은 나는 분명 노동자계급 쪽에 서 있는 사람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는 내가 코니 처럼 살아보는 상상을 하는 게 즐거웠다. 자기만의 커다란 방이 있는 저택에, 아침밥은 침대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하녀가 가져다 주고, 하는 일이라곤 숲 속을 산책하고 남편과 이야기 나누는 일만 해도 되는데다가, 그 일도 지치면  남편 시중  드는사람을 고용하고는 자기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이 여유작작한 귀부인의 삶이  매우 좋아보였던 것이다.  부러웠다. 게다가 기분전환용 숲 속의 산책길에 나갔다가 눈에 띄는 남자 확 잡아 끌어 애인도 만들어 버릴 수 있었는데다가, 그 남자 아이를 임신해 놓고는 남편을 윽박질러 이혼을 요구하기 까지, 이혼 안 해주면 남편 재산은 애인의 아들에게 상속시켜도 할 수 없다고 으름장도 놓을 수 있으니... 오메메, 이거이 좋은 거, 이런 심정 아주 컸다. 그것 뿐이랴, 상속 받은 재산까지 있다잖은가, 남편을 벗어나서 애인과 도망가도 받을 연금이 있다고 하니, 나는 그런 귀부인이 되는 것이 좋겠더라. 볼턴 부인 역할 보다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바람난 귀부인, 채털리 부인이 되고 싶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