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2010년에 읽는 책-조지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자몽미소 2010. 2. 28. 19:53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동물 농장』,『1984』를 다시 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었던가, 집의 책장에 꽂혀 있으니 읽었을 수도 있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게 내가 읽어서 남은 것인지 이미 나와 있는 서평을 읽고 책의 줄거리를 알고 있는 건지 확실치 않다. 게다가 위의 두 책은 이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쓰고 난 후 10 여 년 후에 쓴 작품이니, 작가의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과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보다 더 선명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막장 > 이라는 말이 흔하게 들린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을 때는 강원도 태백 이란 곳이 막장의 공간 쯤으로 이해했다. 이것 저것 모든 일을 해 보다가 마지막 선택으로 가는 곳이 광부가 일하는 막장이란 곳이고 그 곳은 지옥 비슷한 곳이라고 이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젼에 비치는 강원도 탄광 노동자의 얼굴은 검은 그을음으로 눈과 이만 하얬다.

최근 드라마가 <막장>이라고 할 때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간 인생 이야기이기보다는 도덕이나 상식이 없게 드마라 내용이 전개되는 걸 막장이라 한다고 이해했다. 막장에 들어가 노동하던 탄광의 광부 이야기는 세상에 없는 이야기처럼 잊혀지고, 막장 드라마는 노동자의 삶은 철저히 외면한 채 사랑과 증오, 배신과 음모 같은 꾸며낸 이야기로 채워갔다.

 

1부 제 2 장 

 -막장의 세계를 체험하다-

우리 문명의 기반은, 체스터턴에게는 실례지만, 석탄이다. 그것은 곰곰이 생각해서 깨닫는 것 이상으로 완벽하게 그렇다. 우리를 살게 해 주는 기계가, 그 기계를 만드는 기계가 전부 직간접적으로 석탄에 의존하고 있다. 서구 세계의 신진대사에 석탄 광부보다 중요한 존재는 땅을 일구는 농부밖에 없다. (31쪽)

 

 

 노동자, 그것도 막장 광부의 삶을 알아보고자 영국 북부 산업지대를 찾아가 직접 탄광 속으로 들어갔던 조지 오웰은 막상 막장에 들어가 본 후에야 자신이 탄광 노동자의 노동 상황에 대해 얼마나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이 책은 지난 주 일본에 가 있을 때 짬짬이 읽었는데 이번의 여행이 마쓰시로와 마쓰모토의 지하호를 방문하는 일이었기에  책 속에서 조지 오웰이 보여준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마쓰시로 지하로를 파던 1940년 경의 일본 땅의 노동자들, 강제 연행되어 왔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계속 해서 떠올리며 지하호를 보고 또 책을 읽었다. 마쓰모토에  있던 비행기 공장 지하호는 마쓰시로 대본영과 달리  입구부터 매우 위험했다. 작업 중간에 공사가 마무리 되었기에 뽀족하게 솟은 돌덩이들이 여기 저기 있었고, 갑자기 지반이 흔들려 천장이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처럼 조용히 굴 속으로 들어갔던 우리들에게도 위험이 감지되는 그 공간에 65년 전 그 공간은  다이너마이트 폭발과 연이은 공사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지금 보다 더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돌을 쪼고 나르고 터널을 만들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일생이 이 책과 겹쳐져, 책은 영국 북부 지역 탄광 노동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나는 전쟁 준비에 순전히 도구로 쓰였던 노동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지 오웰이 노동자 계급의 상황이 점점 늘어나는 실업 증가와 더불어 나날이 나빠지고 있음을 자세한 수치와 설명을 들어 보여준다. 그들이 사는 집을 조사하고 한 사람이 벌어오는 수입이 어떻게 쓰이고 무엇을 먹으며 그들의 거주지가 어떤 환경인지 기록하였다. 우리 나라 같으면 재건축 지역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의 집을 조사하고 청결 문제나 도시 미관 문제, 그러나 왜 꼭 거기에 살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낱낱이 조사해 보는 식으로, 주택 문제와 더불어 삶의 질 문제를 세심하게 밝혀 주었다. 

 

1부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노동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직접 노동자가 되어 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았다.

2부는 1 부의 사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이 바뀌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집중 되어있다. 그는 그 해결책으로 사회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주의는 몹시도 배격되고 있었다.  자본과 기계의 노예가 될 미래를 막기 위해서 단결을 해야 할 사람들이 왜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는가, 2 부에 있는 글의 묘미는 사회주의가 왜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지를 파헤친 글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힌다. 작가는 그 원인을 사회주의는 좋은데 사회주의자가 싫어서 연대가 안 된다고 본다. 그러기에 정말 좋은 사람들,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내쫒아버리기까지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을 일일이 보여주었다. 작가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를 싫어하는 사람 입장에 서서 왜 사회주의자들이 다양한 사람들을 포섭할 능력이 없는지를 밝혀 보았다. 이 부분을 읽으며 386 세대 라고 민주 세대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 보인 행태들이 함께 읽힌다. 가끔 나는 수염 기르고 생활 한복 입은 민주 투사 입네 하는 이들에게서 알 수 없는 반감 같은 게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 감정의 묘한 부분을 이해 받은 느낌이 들었다.

작가는 정말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파시즘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원인을 이 과격한 사회주의자들에게서 그들의 말하는 편협한 이상주의에서 찾는다. 원론적인 기독교도들이 오히려 교회에서 사람들을 내쫓아 버리듯이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말을 할지 모르는 사회주의자들이야말로, 정말 좋은 사회주의자들을 배격하고 있다고 보았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작가가 말하는 D. H. 로렌즈의 <채털리부인의 연인> 에 관한 글이다. 이 책에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 맬러즈는 식민지에서 돌아와서는  딱히 이전 계급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영국 노동자 계급이 온갖 '불쾌한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가 어느 정도 섞여든 부르조아는 반쯤은 죽은 고자 같은 존재들이다. 채털리 부인의 남편은 상징적으로 그렇거니와 신체적 성생활도 불가능하다.  로렌스는 여기서 부르조아가 죽었다으며 부르조아 가치는 경멸할만하다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오웰이 보기에 로렌스의 이런 표현은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반목만 크게 해 놓는 것이다.

 

오웰은  누구나 공평한 몫의 일을 하고 공평한 몫의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 세계가 적어도 먹을 거리를 충분히 얻는 것만큼은 보장해 줄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누구나의 상식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정막 입지를 다져야 할 곳에서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오웰이 살았던 당시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는 사회주의는 반감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작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야 할 사람들을 쫓아 버리는 무엇이 있었다.

그래서 오웰은 이 책에서 왜 사회주의가 지지를 받지 못하는지를 살폈다.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보통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보거나 그들과 같은 관점에서 헤아려 보았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힘을 모아 대중에게 정확히 설득해야 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고 상대의 마음을 읽는 데도 별로 유능하지 못했다. 이것은 오히려 유럽에 파시즘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줘 버렸다.

 

 오웰이 그리는 사회주의의 이상은 무엇인가,  <정의와 자유 > 다.

사회주의를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하는 사람들이란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노동하기에 딱 좋게 태어난 것 같은 몸을 갖고 태어난 노동자 계급만이 아니라, 은행원도 동네 가게의 주인도 직업을 찾지 못하는 과년한 처녀도, 게다가 경제적으로 노동자 계급 보다 보수를 덜 받는 자기 같은 작가도 해당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건 이 글이 나오던 1930 년대의 영국에 제한된 말이 아니고 서구 세계에만 해당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국에서도 어느덧 힘을 모아야 할 사람들이 구심점을 잃고 파시즘적인 정권에 동조하도록 사회 구조가 변질되어 버렸다.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영어와 자격증의 스팩을 쌓고,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도 힘을 모아 대항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실업의 공포는 권력에 대한 반항을 원초적으로 억누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그들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냉랭한 마음으로 그 일을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보수쪽으로, 파시즘적인 권력( 정부나 자본)에 이미 힘을 보태준 것이다. 그 노동자들과 자기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의식이 깔린 나머지 그 파시즘의 권력이 곧 자신을 자본과 권력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간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한 자들의 힘이 분산되는 동안 권력과 자본의 대부 (그랜드파더) 가  나온다고, 작가는 그 것을『1984』』와『동물농장』에서 표현하였는가 보다. 다시 꼭 읽어봐야 할 책 목록에 조지오웰의 두 작품을 올려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