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속의 시 한 편 |
늙은 밥솥을 위하여
저 밥솥처럼 씩씩거리다가
더 내지를 소리 없어 숨이 막힐 즈음이면
마지막 탄성으로 뜨거운 콧김 길게 내뿜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해졌다
이젠 늙은 밥솥을 이해할 나이
겉은 제법 번지르르하나
속내 들여다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다
콧김은 잦아들고
잠잠한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고슬고슬한 밥은 간데없고
늘 타거나
설었다
늙은 밥솥 하나
흐린 정물처럼 고즈넉하다
* 다른 시집『 어디에 선들 어떠랴 』 에 나오는 시 한 편
관광용 자리젓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
식인종 식탁의 찬거리 보듯
너도 한 번 나도 한 번
냄새 킁킁 맡아보고
입맛 쩝쩝 다셔보는
한심한 외국산 관광객들아
양놈 버터에 흐믈진 그 입맛으로
맛이나 본들 알 리가 있겠느냐
그 맛이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이냐 하겠느냐
보리낭 정지 바닥에 맬싹 주저앉아
흙 묻은 손바닥에
세 갈래 콩잎 두어 장 펼쳐들고
다락다락 미끌어지는 보리밥에
살맛나는 조선된장에
자리젓 대가리 통째로 올려놓고
정성껏 두 손으로 받쳐
잘근잘근 잘근잘근
잘근잘근 잘근잘근
씹어 삼키는 그 맛
그 맛을 너희들이 알 리가 있겠느냐
꿈엔들 생각이나 하겠느냐
어디 먹을테면 먹어봐라
원래 자리란 놈은 기이한 영물로
사람 입에 들어가 배알이 뒤틀리면
송곳같은 가시로 이래저래 쑤셔박아
입 안은 온통 난장판이 될 터이니
어디 한 번 먹어봐라
먹을테면 먹어봐라
(1983년)
* 시를 읽으며
지금으로부터 27년 쯤 전 시와 최근의 시 두 편을 읽는다
1983년에 쓰여진 시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녹아있다. 숨소리는 증기내뿜는 밭솥처럼 씩씩거린다.
제주도에 사는 일이 어떤 차별쯤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때, 그건 저 혼자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외지 사람들, 여기 말로 육지 사람들과 상대하면서 느끼는 것이었다.
특히 음식에 관해서는 비하하는 표정까지 감추지 않는 육지 사람들 때문에 시인은 생 자리의 가시 보다 더 날카로운 짜증을 이 시에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시집에 담긴 <늙은 밥솥을 위하여>는 숨이 잦아든 중년의 남자가 보인다.
김수열 시인의 시에서 백석의 시가 겹친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사유가 백석의 시에서도 있고 김 수열의 시에도 있는데 특별한 음식에 대한 감회는 동향인 김수열의 시에서 동감의 크기가 크다. 당연하다.자리젓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육지 사람 남편에게는 그 맛의 진가를 전달할 수 없다. 여기서 나고 자라고 어릴 때부터 자리젓을 먹었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맛에 대한 감회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字夢のノート(공책) > 자몽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털리부인의 연인 1,2 (0) | 2010.01.30 |
---|---|
더 로드- 불친절한 길과 암울한 희망 (0) | 2010.01.30 |
책소개-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 (0) | 2010.01.19 |
2010년에 읽는 책-그저 좋은 사람 (0) | 2010.01.11 |
2009년의 책읽기-지상최대의 쇼 (0) | 2009.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