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고래-천명관 소설/ 2010년 책읽기

자몽미소 2010. 6. 7. 14:06
 

*책을 읽고 내 생각*

 

조지오웰의 글이 생각났다.

세익스피어를 폄하했던 톨스토이에 관한 이야기.

'톨스토이는 세익스피어의 문학이 문학이 아니라면서 문학은 모름지기 어떠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었다. 그 말은 매우 일리가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의견은 한 동안 회자되다가 곧 잊혀졌고, 그가 그토록 문학도 아니라며 비판하던 세익스피어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인기있고 그의 글은 여전히 읽히고 있다' 는 내용에 관한.

 

천명관의 최근 소설, < 고령화 가족>을 읽은 후에 잡은 이 책은 같은 작가인가 싶게 분위기를 다르게 하여 소설을 출발시켰기에 다소 긴장을 하며 읽기 시작했다. 

소설의 시대는 멀리 일제 시대에서부터 전쟁 기간을 거쳐 근대화 시기까지 시간의 획을 길게 잡았고,  소설의 공간도 산골, 바다, 평대를 종횡무진 오가는 바람에  주인공들이 멈추는 공간마다 이야기가 튀어져 나왔다. <고령화 가족>에서 코미디 시트콤을 볼 때와 같은 가벼움이 소설 읽기의 재미를 배가 시켰다면, 이 소설은 마음 먹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길고 긴 이야기 주머니가 그의 뒷 배경에서 구비구비 골짜기를 이룬 것 같아 보였다. 어디에서 이야기가 끝날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이 긴 구빗길이겠으나 책을 잡기 시작하자마자 그가 지고 온  먼 길 따윈  벌써 잊고 그 길에 동참하고 있었다. 들을 준비 다 되었음 오바! 신명나게 소리까지 치고 싶은 출발.

 

이야기꾼 한창훈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 이거 진짜 사람 사는 이야기네, 사람이 보이네"  하였다가, 천명관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지, 사람의 일이란 이럴 수도 있는 거지" 하였다. 한창훈의 소설은 <현실의 경험 위에서 쓰여진 소설>이라면, 천명관의 소설은 <있음직한 사실 위에 지어진 소설>이었다. 그래서 나로서는 천명관의 소설이 오히려, 무척, 더, 재미있었다.

그러나 한편 문학과 소설가가  마땅히 봉사하게 되는 지점에서 냉정한 판단을 해 보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의심하며  두 소설가를 바라본다면 한창훈이 보여주는 소설의 인물들은 우리 옆에 살면서 밥 먹고, 자고, 아이 낳고, 키우는 실제 인물이라는, 그래서 그들과의 조우는 어쩔 수 없이 삶의 현장을 새삼 발견해야 하는 불편인 것에 비해, 천명관의 주인공들은 허구의 인물이기에 그들에게 떨어진 운명의 불행에 괴롭지는 않은 것이다.  한창훈의 소설에서는 작가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것에 비해, 천명관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읽는 독자에 대한 관심이 더 짙게 배어나온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독자인 내게 와서 배고픈 젖먹이에게 물린 젖처럼 맛좋고 흐믓해서 쭉쭉 읽혔고, 토요일 하루 동안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의 그물에 걸린 아줌마 독자는 설거지도 잊고 빨래도 잊고, 살림사는 주부의 본분을 모두 잊을 지경이었다.

 

소설은 크고 좋은 것에의 욕망을 밑바탕에 깔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거칠 것 없는 것의 뒷면, 누추하고 옹색하며 움추러든 것들의 교합에서 무엇이 태어나는지를 보여줬다.

 

주막집 노파의 욕망,  평대의 부자, 금복이의 욕망은 매우 닮았다.

대갓집 아들 반편이의 커다란 성기를 만나고 몸의 욕망에 눈 뜬 노파는 욕망이 좌절되자 돈 모아 복수하자는 것으로 욕망을 이동시킨다. 그러나 복수 하기 위해 반편이를 개울물에 죽게  만드는 대신,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모았던 돈은 자기 손으로는 한 푼도 쓰지 못하고 죽고 만다. 딸에게도 뺏기지 않고 깡패들에게도 뺏기지 않은 그 돈은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전해진다.

노파의 돈은 금복( 돈복이라는 작위적인 이름)에게 물벼락으로 떨어진다. 금복은 그 돈을 밑천으로 거지 여자에서 평대의 거부가 되고 그렇게 자꾸 이전의 모습에서 탈피를 하다가 결국은 여자에서 남자가 되어 아름다운 여자 수련을 취한다. 그러나 물을 통하여 만들어진 그녀의 돈복은 늘 그 끝에 불행을 엮고 있었다. 생선 장수를 따라 바다로 나왔고, 생선장수에게서 몸이 큰 남자 걱정에게로 떠나갔고, 걱정에게서 칼잡이에게로, 칼잡이에게서 수많은 남자로 몸을 옮길 때마다 그는 점점 자신의 욕망을 부풀렸고 그녀는 몸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지만, 그의 욕망은 물이라기 보다 불과 같았기에 그 불을 이용해 벽돌을 구워낸다. 벽돌은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기의 건설붐에 힘입어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고, 그녀는 그 자본을 바닥에 깔고 고래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워낙 강한 그녀의 욕망은 그녀 자신을 깡그리 없애는 데 이용되고 만다. 대화재가 난 것이다. 그녀의 바다, 그녀의 고래는 대화재로 모두 사라지고 만다. 욕망은 죽음으로써만이 잠재울 그 무엇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는 죽고 평대라는 소도시도 허물어진다.

 

그러나 욕망과 욕망의 결합 사이엔 항상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이 태어나거나 운명이 그들을 쫒아가며 괴롭힌다.

반편이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은 주막집 노파는 딸을 애꾸로 만들어 버리고 ,  꿀벌치는 노인에게 팔아버린다. 금복은 자신의 딸이 몸이 큰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유로 딸을 거부한다. 딸은 벙어리이며 통뼈의 거구로서 어머니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숨듯이 자라난다. 이후 대화재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경찰들은 말 못하는 그녀를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하고 딸 춘희는 감옥에서 온갖 수난을 당해야했다.

욕망의 결실은 이렇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욕망의 주체들이 겪어야 할 것까지 합쳐서 사는 듯, 불행한 운명을 산다. 

 

그러나 이 오랜 동안의 이야기는 평대라는 땅, 죽음의 물( 저수지와 바다), 주인공들의 불같은 욕망이 합쳐서 하나의 예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후 어떤 건축가에 의해 '붉은 벽돌의 여왕' 로 칭송받게 된 금복의 딸 춘희는 스스로는 결코 의도하지 못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작품이 될 벽돌을, 죽을 때까지 만들어 냈던 것이다.

벽돌은 물과 흙이 이겨져서 불을 만나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어머니의 땅, 평대에서 어머니의 욕망이 불이 되어 춘희의 벽돌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는 춘희의 육중한 몸, 흙을 다지고 이기는 춘희의 튼튼한 다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어머니 금복의 욕망은 그녀가 거부했던 딸 춘희의 몸을 통해서야 비로소 의미있는 하나의 질료로서 역할 했던 것이다. 

 

 

작가는 어느 글에선가,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 사람사는 데서라면 있음직한 이야기를 모아 이 소설을 만들어 냈다고 했다. 그 자신 어디선가 들었고 누군가라도 들었음직한 이야기들이 이 소설을 이루는 것들이다. 그러니 있음직한 이야기들은 어느 것이고 소설의 재료가 될 것이고, 세상에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들, 그래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은 더욱 더 흥미로운  소설의 재료가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누구나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는 이 세상 이야기를 모아 이야기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천명관 처럼 말이다.

 

그러나 또, 이 소설 <고래>를 읽고 나서 그와 같은 맹랑한 희망을 가질 사람이 있을까, 이 사람은 누구나 먹는 밥과 반찬을 가지고 이제까지 듣도보도 못했으나 너무나 맛좋은 요리 한 접시를 척 하고 내놓는 천재 요리사 같아 보이는 걸,  아무 재료나 가지고 요리를 한다고 해서 아무나 요리사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명관은 진짜 이야기꾼이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재능의 소유자이다. 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구체적인 삶과는 매우 먼 인물들의 뻥과 구라가  불꽃처럼 터지며 순식간에 사라져가도 독자에게 남긴 재미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소설의 인물은 차츰  희미해지지만  읽는 내내 느꼈던 깊이 빠짐의 스릴은 진하게 남아 있어 나는 이 책과 작가가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