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영화 映画の話

キャタピラー(caterpillar):

자몽미소 2010. 6. 29. 21:15

캐터필러 포토 보기

 

 

caterpillar(실용과학) 전문용어대역사전
캐터필러 요철이 심한 노면이나 진흙바닥에서도 주행 가능한 크레인, 경운기, 탱크 등의 바퀴구조로, 차륜 대신에 벨트 모양의 띠를 걸어 회전시켜 주행하는 장치
 
 

-cat·er·pil·lar   1 명사

OF 「털 많은 고양이」의 뜻에서

  

概説

江戸川乱歩の短編小説『芋虫』と『ジョニーは戦場へ行った』をモチーフにしたオリジナルストーリーである。

2010年ベルリン国際映画祭コンペティション部門に出品し、寺島しのぶが最優秀女優賞(銀熊賞)を受賞した。同映画祭では、授賞式に参加できなかった寺島の代わりに若松孝二監督が壇上に上がり、寺島から届いたメールを読み上げた。

 

江戸川乱歩 의 단편소설 芋虫  (이모무시)< 나방( 비유적으로는 '보기 싫은 놈')>와 < 쥬니는 전쟁터로 갔다>를 모델로 한 오리지널이다.

2010년에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콘베티션 부문에  출품해서 데라시마시노부가 최우수여우상(은곰상)을 수상했다. 그 영화제에서 수상식에 참가하지 못한 데라시마를 대신해서 감독이 단상에 올라 데라시마의 편지를 읽어주었다.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 위 아래 모두 위키백과 출전, 번역은 저에요.)

 

芋虫 (小説)

 

芋虫』(いもむし)は、江戸川乱歩の著した短編小説である。

新青年』に、昭和4年(1929年)に掲載された。編集者の要望により、掲載時のタイトルは「悪夢」とされたが、後に「芋虫」に戻された。

角川文庫の解説によると、当時は『改造』のために書き下ろしたものであったが、反戦的な表現と、勲章を軽蔑するような表現があったため、娯楽雑誌である『新青年』にまわされた、とのことである。それでも、掲載時は伏せ字だらけだったそうである。また、戦時中は全編削除を命ぜられた。

なお、乱歩は本作を妻に見せたところ、「いやらしい」と言われたという。また、本作を読んだ芸妓のうち何人もが「ごはんがいただけない」とこぼしたともいう。

2005年公開のオムニバス映画「乱歩地獄」で映画化されている。また、2010年公開予定の映画「キャタピラー」も本作を原作としている。

<나방>江戸川乱歩이 쓴 단편소설이다. 소화 4년 (1929년)에 <신청년>에 게재되었다. 편집자의 요망에 의해 게재시의 제목은 <악몽>이었다가 후에 <나방>으로 고쳤다.

각천문고의 해설에 의하면 당시는 <개조>에 다시 쓰려고 했었지만, 반적적인 표현과 훈장을 경멸하는 것 같은 표현이 있었던 때문에 오락잡지인 <신청년>에 보내졌다. 어떤 일이---. 그런데도 게재시에는 명기 곤란한 부분을 가린 것 투성이였다고 한다. 또 전쟁중에는 전편 소각을 명령받았었다.

게다가  江戸川乱歩의 이 작품을  처에게 보였더니 "징그러워"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또 이 작품을 읽은 예기의 여러 사람도 "이런 게 있을 수 있나" 며 투덜거렸다 한다.

2005년에 공개된 옴니부스 영화 <활보지옥>으로 영화화 되었고, 또 2010년에는 공개예정된 영화 <카타삐라>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 


傷痍軍人の須永中尉を夫に持つ時子には、奇妙な嗜好があった。それは、戦争で両手両足、聴覚味覚といった五感のほとんどを失い、ただ視覚触覚のみが無事な夫を虐げて快感を得るというものだった。夫は何をされてもまるで芋虫のように無抵抗であり、また、夫のその醜い姿と五体満足な己の対比を否応にも感ぜられ、彼女の嗜虐心は尚更高ぶるのだった。

ある時、時子は夫が僅かに持ちうる外部との接続器官である眼が、余りにも純粋であることを恐れ、その眼を潰してしまう。悶え苦しむ夫を見て彼女は自分の過ちを悔い、夫の身体に「ユルシテ」と指で書いて謝罪する。

間もなく、須永中尉は失踪する。時子は大家である鷲尾少将と共に夫を捜し、「ユルス」との走り書きを発見する。その後、庭を捜索していた彼女たちは、庭に口を開けていた古井戸に何かが落ちた音を聞いたのだった…。

出版 [編集]

 

 

 

 

 

 

 

 

 

 

 

 

 

 

 

 

 

 

 

영화를 보고 나서

 

22일 오전, 호텔 로비에서 신문을 보다가 이 영화가 오끼나와에서부터 상영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영화관에서 지난 19일에 처음 상영을 하였고, 그날은 데라시마시노부 도 참석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22일 오전은 시간이 비었으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하였다.

극장은 오끼나와 국제거리에서 중앙시장쪽으로 꺽어 들어간 곳에 있었다. (사꾸라사카 극장)

 

전쟁은 도대체 무엇인가?

 

영화는 이 물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 전쟁이란,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 또는 그들의 부재에 따른 가난을 동반한 삶을 살게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처럼 영영 돌아오지 못한 남편이 아니라, 돌아오긴 했지만 그 이후의 삶이 더욱 힘들어지는 경우에 여성은 국가의 국민 이전의 본래적인 인간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시게꼬의 남편은 중일 전쟁 때 팔과 다리를 잃고 귀가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남편의 몸을 보고 시게꼬( 데라시마 역)는 울부짖지만, 이내 이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남편의 오줌을 눕히고 밥을 먹이고 들로 일하러 갈 때는 데리고 나가고, 집안을 거두는 모든 일은 혼자 한다. 그러나 남편은 팔다리가 없어지고 말을 못하고 귀가 먹은 상태에서도 기본욕구가 매우 강해져서 그녀를 더욱 갈망하고 탐닉하며 아내가 먹을 분량의 죽마저 혼자 다 먹고자 한다.

남편이 왜 그런 모양으로 전쟁에서 다쳤는지 아내 시게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시작점에 그 일이 중일 전쟁과 남경 대학살과 관계있었음을 시사 받는다. 남편은 중국에서 민간여자를 강간하고 죽였고, 그 와중에 화상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 돌아온 남편은 전쟁 영웅이 되어 마을 사람들로부터 군신으로 숭앙되고, 군인의 모범으로 추앙된다.

 

영화는 자주, 소화 천황의 사진을 보여주고, 남편이 받은 훈장과 오려서 액자에 담아둔 신문기사를 비춘다.  사지가 절단된 군인이 누워 있는 방에 천황과 신문은 매우 이상스런 대조를 보여준다. 부상한 군인은 신문기사에 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다소 진정하고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 해 보지만, 그 속이 어떤지는 잘 알 수 없다.  이 불행의 원인은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사건에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고백하여 용서 받을 수도 없고 손이 없으니 속죄를 기록할 수도 없다. 신문기사를 들여다 보고 승전하고 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는 것이 그의 양심을 마비시켜 일상을 넘길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아내 시게꼬의 심정은 이 불우한 군인을 보며  복잡하다. 가엾은 아이같은 사람이니 먹고 자고 먹고 자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돌아올 것이면 왜 온 것이냐고 항변해 본다. 그러나 그녀의 모성은 끊임없이 이 불쌍한 남편을 위해 봉사하게 한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쟁이 이 나라를 위한 성전이라고 믿고, 시게꼬에게도 군신을 잘 모셔서 군인 아내의 모범이 될 것을 강요한다. 시게꼬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의젓하지만, 결코 그 자신 자기의 남편과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전쟁은 계속되고 마을의 아들들은 다시 전장으로 내보내진다.  

마을에서 진정 용기있고 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동네의 바보로 취급되는 남자 하나 뿐일 것이다. 그 만이 전장으로 나가는 군인을 위해 신사에 모인 사람들을 조롱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그 마을에 있고, 그 마을은 전쟁 중인 일본의 축소판이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고, 패전을 시인하는 천황의 목소리를 듣고 슬퍼한다.

그러나 그 마을에서 단 두 사람은 환한 웃음을 웃는다.

마을의 바보와 시게꼬 두 사람만이 이제 좋게 되었다며 웃을 수 있었다. 그 시각, 남편은 집의 물웅덩이까지 자기 몸을 끌고 와 투신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일본 속에서 차츰 더 용기 있는 예술가들이 나오는 것 같아 반가웠다.

돌아와 찾아보니 이 영화는 1929년에 나온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하니, 그 시절에 원작이 받은 푸대접을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서도 제대로 바른 말을 못하였던 것이 오래였다. 제대로 말할 수 없이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국가는 다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준비한다. 일본은 자위대를 만들었고, 우리 또한 부국강병의 모토가 계속 된다.  군인이 된다는 것은 어느 한편 어떤 살상을 정당화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되는데도, 그 점은 간과하고 나라를 위한 우아한 명분만 강조하는 나라, 가족이 전쟁에 동원되고 생명을 담보하였을 때 남은 가족이 받아야 하는 불행은 보지 않은 채, 국방의 의무를 강조하는 전쟁예비국가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영화의 말미에 나온 주제 음악이 매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