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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가이의 아베일족- 2015년의 책읽기(11)

자몽미소 2015. 4. 27. 17:58

 

 

* 책부족의 3월 책읽기

 

▣ 책을 읽고 내 생각

 한국 근대 문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이인직의 <혈의 누>와 일련의 신소설들은 고대소설의 운문체를 벗어났고, 국한문 혼용체를 썼으며 고대소설과는 다르게 자주의식과 개화사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신소설은 근대문학과 고대소설 사이의 과도기 소설이라는 꼬리표도 붙는다. 권선징악의 천편 일률적인 주제는 고대소설의 이야기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고, 구시대적 가치관의 극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10년- 1920년에 이르러 이광수가 등장하고, 최남선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근대문학기에 접어 들었고, 

1930~1940년대는 작품의 수와 작가의 수도 늘어서 한국 근대문학의 르네상스기라고 하였다.

 

모리 오가이의 책을 읽으며, 이 작가의 천재성에 놀랄수록 동시대의 한국 문학은 어떠하였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첫소설 <무희>가 1890년에 발표되었을 때 우리 나라의 문학은 <신소설>의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외국어에 능통한 그가 <파우스트>를 번역하고 외국의 문학과 예술을 일본에 소개했다는 것 또한 부러운 일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보다 더 일찍 서양의 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소화해 내며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던 일본에게 있어서 모리 오가이와 같은 천재가 나왔던 것은 자연스런 일인 동시에, 또한 행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거듭 하였다. 그러나 모리 오가이 개인은 자신의 갖고 나온 천부적 재능을 만끽한 것 같지는 않다.  주위의 기대에 따라 의사와 관리가 되었고, 집안에서는 효자였지만,  죽음에 이르러 그의 묘비명에는 어떤  관직명도 적지 못하게 한 일은 그의 내면이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이었음을 시사한다. 작가로서의 모리 오가이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책은 네 개의 중단편으로 묶인 것이다.

< 아베 일족> < 무희> < 기러기> < 다카세 부네(船)>가 그것이다.

 

 1.<아베일족>은 순사를 허락받지 못한 남자의 가족에 관한 것이다. "순사를 허락받는 영예" 라는 것은 16세기 일본 무사 계급의 한 문화였다. 순사를 허락받은 무사들은 기쁜 마음으로 할복을 하였다. 보다 더 멋지게 할복을 하려고, 자신의 할복을 도와주는 친구까지 준비해 두었다. 할복을 하도록 되어 있는 무사의 가족들 또한 그 죽음을 편안히 받아 들인다.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통 이해되지 않는 죽음의 방식이었다.

  소설은 "순사를 허락받지 못한 불명예" 문제가, 아베 가족을 몰락으로 몰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즉, 할복이 허락되지 않은 무사가 살아 있을 명분을 찾지 못하고,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할복을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할복을 통해 자식들은 불안감을 해소하였으나, 그의 할복은 오히려 새로운 주군을 모욕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 아베는 살아 있을 수도 없었고,  결심 끝에 할복을 하였으나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아들들에게 화가 미쳐, 아베 일가는 모두 죽음을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을 꼽으라면 주군 다다토시의 마음 속 묘사가 아닐까 싶다.  다다토시는 야이치에몬이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충성심이 강하며 눈치빠르고, 주의가 깊어서 혼낼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다다토시의 마음은 다음과 같다.

 

- 야이치에몬은 스스로의 의지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그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그러나 현명한 다다토시는 야이치에몬을 미워하면서도,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것지 생각해보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대하는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달이 흐르고 해가 지남에 따라 점점 고치기 어려워졌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왜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탐구해 보면 웬일인지 이렇다 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 다다토시가 야이치에몬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책 30-31쪽

 

아베 일족의 불운에 관한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이성으로 마음을 다스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명분이라는 것에 숨어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극악한 면이 있는지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2.<무희>는 모리 오가이가 독일 유학 당시의 자신을 그렸다고 일컬어지는 소설이다. 나약하고 비겁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 소설이라, 인간에 관한 서늘한 보고서와 같았다.

 

-라는 인간을 나조차 몰랐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단 말인가! 내 마음은 자귀나무 잎과 비슷해서 뭔가 닿으면 움츠러들고 피하려고 한다. 내 마음은 겁 은 처녀 같았다.... 책 68쪽-

- 나는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무언가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 대답의 범위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바로 승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승낙한 이후에 어려움을 깨달아도, 억지로 승낙 했을 때의 사려 깊지 못함을 숨기고, 참고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책 82쪽.

 

3.<기러기>는  앞의 두 소설의 단계를 훨씬 더 뛰어넘는 면이 있었다. 단숨에 읽게 만드는 이야기의 재미와 시간과 공간을 작가가 마음대로 주무른 듯한 플롯의 구성 등 소설적 기법이 돋보였다.

 

소설 속 화자의 친구인 '오카다'의 탁월한 면모와 그가 흠모하게 된 아름다운 여인 '오타마', '오타마'를 손에 넣으려고 온갖 술수를 쓰는 고리대금업자 '스에조'에 관련된 이야기는 각각, 사람의 관계에서 애정이 어떻게 싹트고 그 애정이 무엇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 '오카다와 오타마'와의 사이에는 풋풋하고 조심스러운 청춘의 사랑이 흐르는 반면, '오타마와 스에조' 사이에는 돈이라는 권력이 매개가 되어 사랑의 강을 혼탁하게 한다.

 

  오카다에게 오타마는 산책길에 자주 보이지만 굳이 신경을 쓰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자주 같은 상황을 접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오카다의 머리 속에는 오타마가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길가 집의 여인 오타마가 어쩐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곤 한다. 이것은 청춘의 사랑의 한 전형이다.

  오타마에게도 오카다는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행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이 남자를 기다리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자각과 함께  자신을 부양하고 있는 스에조에 대하여 멸시감도 일어난다. 스에조에게는 본가에 아내와 자식이 있고, 그의 직업은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고리대금업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이후, 오타마는 스에조에 대해서 마음 속 거리를 두게 된다. 스에조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고 있고, 그 덕분에 늙은 아버지를 모실 수 있게 되었지만, 자기 자신 전혀 스에조를 사랑하지는 않고 있음을 자각하는 오타마. 이러한 자기의 발견은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고, 남자에게 예속된 여성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근대의 여성의 출현처럼 보인다.

  오카다와 오타마의 청춘과는 다른 양상으로, 스에조는 두 집 살림을 하며 일신의 편안을 도모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손톱만큼의 반성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스런 오타마와  아이를 키워줄 본처는 둘 다 필요하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진 스에조는 본처의 불만과 요구에, 적당히 대처하는 능수능란을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과의 사랑은 동물적 본능으로서의 안위에 있다. 아내를 이용하고, 오타마를 이용하고 있지만, 아내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타마의 속마음은 더욱 더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스에조는 교감해야 할 것을 교감할 수 없는 감정의 불구 상태이나, 소설의 배경이 된 그 시대에는 스에조 같은 인물에 대한 사회적 제재가 크지 않았으므로, 그의 행보는 계속된다. 이 소설의 재미는 사실, 스에조가 부리는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 데서 잘 나타나 있다. 현대의 우리들이 읽어도, 뻔뻔한 남성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작가는 작중 인물들간에 오고가는 갈등과 혼란을 잘 그려내었다.

 

 하지만 <기러기>에서 작가가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우리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우연과 우연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고, 그 우연이 일으키는 불행을 인간이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오카다를 연모하는 중에 오타마는 몸은 스에조에게 묶여 있을지언정 마음은 이미 자유의 날개를 달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느 날 스에조가  여행을 떠날 것을 알고, 사랑하는 오카다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그녀는 집에 있던 하녀까지 집으로 돌려보내고 오카다와 만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한다.

 그런데, 작중 화자인 내가 그날 하숙집에서 나온 고등어된장조림이 먹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오카다를 꾀어 산책길에 나가는 바람에, 오타마가 예상 했던 만남의 장면을 방해하고 말았다.  작중 화자로서는 오타마의 계획 같은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또한 오카다도 작중 화자에게 자신이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의 산책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산책길에 만난 또다른 친구가, 기러기를 잡아 요리를 하겠다는 호기를 부림으로써 오타마의 집 앞을 지나올 때는 세 남자의 이상한 동행이 연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일 또한 젊은 친구들의 산책길에서 일어남직한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문제는  작중 인물이 오카다와 동행하고, 친구와 기러기를 잡음으로써, 오타마의 인생을 방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타마로서는 용기를 내고 머리를 쓰면서 자기 삶의 울타리에서 조금이라도 자유의 냄새를 맡아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느껴 보려했던 기회였지만, 오카다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녀는 연못 위에 있다가 돌맞은 기러기처럼 자기를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작가는 이 기러기 사건의 진실을, 아주 오랜 후에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가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되지 않고, 세상의 우연이 자신을 방해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생이겠다.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한 여성, 근대적인 자아의 발견이, 의도하지 않은 우연에 의해 소리도 없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다카세부네>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초연함.

 

 

 

 

 


아래 사진은 나쓰메소세키와 모리오가이의 에세이를 모아 놓은 책.

고서점에서 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