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물방울-메도루마슌/ 2015년의 책읽기(13)

자몽미소 2015. 4. 29. 15:32

 

 

 

 

책을 읽고 내 생각

메도루마슌의 <물방울>은 기억의 휴유증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 도큐쇼는 어느 날  갑자기 다리와 발이 부어오르기 시작하더니 동과( 박 종류로 오끼나와에서 식용으로 먹음) 만큼 커진다. 의사를 불러봤으나 원인을 알 수 없고 급기야 부은 발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도큐쇼가 부은 발을 하고 누워 있으면, 밤마다 귀신들이 온다. 그 귀신들은 오끼나와 전쟁 때 만났던 일본 본토의 군인도 있고, 오키나와의 방위대 친구들도 있었다. 목이 파이고, 창자를 흘리며 도큐쇼의 침대 옆으로 몰려오는 군인들은 나날이 늘고, 그들은 기이한 행동을 한다. 군인들은 한 사람씩 무릎을 꿇고 도쿠쇼의 발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라진다.

 

도쿠쇼를 찾아오는 군인 중에 친구 이시미네가 나타나자, 도쿠쇼는 매우 힘들어 한다.

도쿠쇼는 현재 현 내의 학교 등지에서 전쟁체험을 들려주는 봉사활동을 하고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참혹함을  어린 학생들에게 이야기 하는 중에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 요령을 터득한다.  세월이 지나가자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기억 중에서 거를 것은 거르고 말할 것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 한 구석에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있어서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걸을 수도 없이 발과 다리가 부어 있자 옛날에 죽었던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귀신이 되어 찾아온 친구 이시미네는 역시 다른 군인들 처럼 도쿠쇼의 발을 빨며 물을 얻고 간다.

 

이 물은 참으로 이상한 기적의 물이었다. 도쿠쇼의 아내의 친척이 아내 대신 그를 돌보면서 그 물의 효능에 눈을 떴다. 그 물을 마시면 젊음이 돌아와 빠졌던 머리가 돋아나고, 성적으로도 왕성해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낮동안 도쿠쇼의 발에서 받은 물을 모았다가, 몰래 내다판다. 물은 양을 줄이고 값을 올려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었다.

 

전쟁에 대한 공식기록과 전쟁 증언록으로 오키나와 전쟁을 아무리 묘사해 보아도, 개인의 깊은 감정의 문제까지는 건드릴 수 없다. 이 소설에서는 도쿠쇼 개인이 자기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지울수록 상처가 커지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 주었다.

도쿠쇼는 친구 이시미네와 함께 동굴에 숨어 있다가 이동을 하게 되자 친구만 동굴에 두고 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숨겨 왔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이시미네가 그 당시 많이 아프긴 했지만 굳이 데리고 나왔다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친구를 버려두고 도망나온 사람이라는 자화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마을의 여학도병이었던 세쓰는, 도쿠쇼가 도망끝에 잡혀 수용소에 있을 때 거기서 멀지 않은 섬에서 집단자살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자, 도쿠쇼는 스스로 비겁자라는 생각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도쿠쇼의 발에 이상 증세를 나타나게 하고 그것 때문에 죽은 영혼들을 불러 모으면서, 오래된 것과의 화해를 그려낸다. 오래 살아온 그가 쓰러지고, 오래 전에 쓰러졌던 군인들이 살아나와 그의 몸에서 물을 마시면서 서로의 시간을 교차시키는 것이다. 죽은 군인들은 살아서 돌아가고, 그 수가 많아질수록 부었던 그의 발은 나아지고 있었다.  소설에서 "물방울"은  너무 깊어 꺼내지 못한 "말"이  생명수로 변한 것이다. 가슴에 묻어두어 도쿠쇼를 죽음으로 몰아가던 기억이 피와 같은 몸의 물이 되더니 젊어서 죽은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 번역문제: 이 책의 번역은 이전에  같은 작가의 다른 책<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을 번역한 유은경 씨가 맡았다. 번역본에서는 대화 내용이 모두 경상도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함경도 방언도 있고 전라도 방언도 있는데 "왜 경상도 방언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한국에서 오끼나와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끼리 토론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번역을 한 유은경 씨가 경상도 출신이어서 그랬다는 말이 있다. 번역자는 원문의 오끼나와어의 묘미를 살리고 싶어서 경상도 방언을 썼을 것이지만, 이는 독자가 모두 경상도 방언을 이해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번역자에겐 익숙한 경상도 방언이, 어떤 독자에게는 글읽기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 나의 <물방울> 이라는 작품은 일본적인 표현에 동조해 실험성이 약하다는 비평을 받습니다. 내가 정말로 설명이나 지문까지 오키나와어를 집어넣어 실험적으로 쓰려했다면 왜 못했겠습니까. 다만 그런 실험적인 작품을 당신은 읽을 수 있겠냐고 묻고 싶어요. --

언어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니라 독자의 문제이기도 하고, 편집자의 문제이기도 하며, 출판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독자적인 문제를 갖지 못했던 오키나와어에는 표기의 문제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본토의 독자는 읽지 못해도 좋다, 오키나와의 젊은 세대도 읽지 못해도 좋다, 출판사를 통해서 유통되지 못해도 좋다, 개인지나 동인지에 발표한다, 철저히 실험성을 추구한다면 이렇게 각오를 단단히 할 수밖에 없겠지요.  --- 저도 <물방울.에서 오키나와어를 일부분 사용했습니다만, 한정적이었을 뿐 결코 실험적인 사용은 아니었습니다.-- 책,<오끼나와의 눈물>, 메도루마 슌, 142-3쪽 중에서

 

*문학동네의 다른 책

박유하 씨가 번역했고, 양윤옥씨가 번역했으니 이 책은 읽어볼만할까해서 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