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서원 출판사 堂山書院/혼자하는 출판사

때밀며 떠오른 할 일

자몽미소 2016. 3. 9. 14:06

 

책장 정리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뭐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뭔가 할 일이 많았는데 그 다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 정리 외에는 목표가 없었던 사람처럼, 거실에 쏟아져 나왔던 책들을 책장 속에 담아 놓고 멍해 있었다.  이런 나를 보고 아들은

" 엄마! 책정리만 끝내면 노벨상 받을 소설 쓰는 줄 알았는데 !"

하며 놀렸다. 

 

제주도에 돌아와서는 어디에 가고 싶어지지 않는 것, 신나는 일이란 없으며, 더 정확히는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야 좋을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고향이 타향과 같은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다고 오는 이 땅에서, 갈 곳을 잃은 사람, 할 일을 못 찾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후에는 매번 고질병처럼, 이제부터 무얼하지 하고, 할 일을 잊어버리곤 한다. 할 일이 기억났다고 하여도, 제주도에 돌아온 다음에는 하려던 일의 의미를 찾지를 못하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자조하게 된다. 제주에 있는 나는 못난 사람, 아무 것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 해 봐야 쓸 데 없는 것에 애를 쓰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 마음의 병은 오래전부터 생겼고 지금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제주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인가. 제주를 떠나서야 신이 나고, 이곳에 사는 동안은 헤매기만 하는 시간들, 그걸 후회하면서도 어쩐지 제주에 있고, 우리집 안에 있으면 나는 시들어 가는 것 같다. 뭔가 신나게 해 보지도 못하고 내 생이 다 낡아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 슬퍼지고 억울해졌다. 분하기도 하고 겉으로만 의연하고 내적인 힘이 없는 나에게 짜증이 나기도 하였다. 

이런 날, 때를 미는 것이 좋다. 오전에 나가는 사우나 목욕탕에서 때를 밀었다. 매일 목욕통 안에서 더운 물을 뒤집어 쓰는 동안에 차곡차곡 낀 때가 때수건이 움직일 때마다 지우개 똥처럼 밀려나왔다. 의식을 치루듯 조용히,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쓱쓱, 벗겨낸다. 몸의 때를 밀다 보니 비로소 머리 속도 개운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선 오래 전에 하다 만 일 하나를 떠올렸다.

그것은 제주도를 발로 걸어 보는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제주도 땅을 걸어보자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어디에 가고 싶은가. 가고 싶은 곳은 없다.  나를 오라고 하는 데도 없다. 하지만 가 봐야 할 데는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지로는 그곳에 관해 아는 게 없는 장소가 내가 가 볼 곳이다.

 

오키나와에 있을 때, 시간 부족을 느꼈다. 가 봐야 할 곳은 너무나 많고 알아보고 싶은 곳도 너무나 많은데 두 달 동안, 다 가 볼 수가 없었다. 오키나와에서는 그 땅에 호기심이 가득하던 내가 왜 이곳, 제주에 와서는 호기심도 신명도 사라져버렸는가, 가고 싶은 장소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가. 그건 내가 제주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제주도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 가 봐도 다 알고 있다고 하는 착각이 이곳에 있으면서 내가 선 땅에 대해서 알려고 하질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주도에 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남편을 따라 다니다 보니 태평양 전쟁 시기의 섬들의 역사와 문화에는 흥미를 갖게 되었지만, 제주도가 태평양의 섬 중  하나라는 사실은 왜 외면하고 있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비로소 할 일이 생각이 났다.

이 일은 남편이 10여 년 전에 시작한 일이지만, 그 후 한라일보사에서 자기들이 발의한 일처럼, 마치 연구의 소유권이라도 있는 듯 가져가 버린 일이다. 남편은 보고서만 내는 선에서 이 일을 마치고 말았다. 그 후속 작업은  다른 연구와 시간 부족으로 계속 미루고 있었다.

우선, 나는 남편이 하던 일을 태평양 섬의 역사를 배우는 연장선 상에서 보기로 하였다. 그 공부를 하기 위해서 내 눈으로 보고 내 머리로 생각하는 일을 하려한다. 제주도를 알기 위해서 제주도를 걸어보리라. 내 발로.

 

내가 그리는 그림은

1-내 눈에도 보이고 남의 눈에도 보이는( 보이게 된) 일본군 전적지를 찾아간다.

2-이에 따른 기록 사항( 위치와 소요 거리, 지도)

3-전적지의 특성을 남편에게 묻고, 남편은 설명해 준다(질의 응답)

4-남편이 이야기 해 준 것을 풀어쓴다.

5-전적지 필드워크 작업기록

6-여행기와 같은 형식으로 쓴다( 조사 후 다음 날, 할 수 있는 데까지)

7-더 알아봐야 할 것, 추가 사항: 남편이 쓴 조사 보고서를 참조하여 자세히 적어 둔다.

8-횟수: 일주일에 1회꼴로( 금요일, 또는 토요일- 여행기쓰기는 그 다음날)

 

주중의 작업

-전경운의 수기 편지

 

1. 그의 글을 다시 옮겨 적는다

2. 글 내용을 편집한다.

3. 수기 내용 사이에 사료를 넣는다( 조성윤작업)

독서의 방향

-5월 사이판과 괌, 티니안 조사여행을 위해.

-그곳에 가기 전에, 사이판, 괌, 티니안 관련 책들을 읽는다.

- 책 내용을 번역해 둔다.

-책 속에서, 우리가 가 봐야 할 장소를 찾아내서 여행 중에는 직접 가 본다.

-전경운 수기 속에서도 장소를 체크 해 둔다.

- 직접 본 느낌과 책에서 읽은 내용을 비교하여 글을 써 둔다.

 

 

 

 

 

-이렇게 되어서, 지난 겨울부터 쓰다고 생각하고 있는 <고구마 이야기>는 또 밀리게 된다.

남편의 연구 조수 일에 시간 할애가 급하기도 하려니와 고구마는 더 공부해야 할 것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해 상반기에는 티니안 섬에서 생을 마친 조선인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제주도의 일본군 전적지를 쓰기 시작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을 잡는다.

고구마 이야기는 티니안의 조선인 이야기를 마친 후에 들어간다. 12월 초에 남편에게 원고를 넘긴다.

일본군 전적지 이야기는 내년까지 계속하여, 내년 12월 경에 원고를 남편에게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