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서원 출판사 堂山書院/혼자하는 출판사

출산과 출간에 관해

자몽미소 2016. 11. 10. 14:39

  자기 일 없이 전업주부로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장맘들.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피로한 사람들에게는 자기 대신 돈 벌어다 주는 가장이 있고, 남편 혼자 벌어도 경제적 곤란이 크게 없는 일이 부러울 것이다. 집안에서 권력 서위 1위인 주부야말로 상사와 동료들과도 긴장되고 째째한 관계 맺기를 안 해도 되니, 직장맘들에게는 전업주부야말로 자유롭고 편안한 삶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 또한 직장의 단체생활을 잘 못하는 것 같고, 내가 버는 만큼의 경제절약을 하면 나머지는 편한할 것이라 여겨 직장을 그만 두었다. 혼자 벌어 아들과 둘이 살 때는, 직장이 밥줄이었지만 결혼을 하니 돈 벌어다주는 사람이 생겨서 내 월급봉투 자리는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요새 나는 나처럼 일을 갖지 않은 아줌마끼리, 우리가 어쩌다 이리 되었나 한숨 크게 쉬며 직장 버린 걸 후회하는 게 잦아졌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는 홍상수의 영화제목처럼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좀 참고 더 다닐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였다. 한 친구는, '이제 우리 나이  또래 아줌마는 동네 마트에서도 안 받아줘!' 라고 하니 "왕년에! 나는 어쩌구 저쩌구!" 할 것도 없는 나는 "이제껏 뭐 하면서 살았지?' 스스로 묻고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직장이 없고 그래서 돈을 벌지 못하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줄 사회적 지위마저 없이, 어쩌다 카페에라도 가면 너무 큰 목소리 때문에 민폐나 끼치고 마는 동네 아줌마로 사는 우리같은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쓸모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데서, 아줌마들끼리 의견일치. 

 

  어제는 노래 동아리 선후배끼리 산행 벙개(번개)를 했다. 아줌마끼리 모여 다니기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조금은 추웠던 산길을 걷고, 따뜻한 밥집에서 배를 불리고, 코스 요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찻집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후배들 중 세 명이 전업주부였다. 그리고 당연하게 전업주부로 살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이야기는 예상외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여 사는가로 흘러갔다.

  한 후배는 대학 전공을 마치고 다시 음악을 공부했지만 지금은 전공을 살려 직장을 갖는 대신 아이 셋을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모처럼 어렵게 해 낸 전공공부를 주부 일 하느라 살리지 못하는 게 아쉽지 않나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공부하고 싶었던 것을 공부해 본 것으로 만족한다고 하였다. 그때는 음악 배우며 열심히 살았고, 지금은 아이들 열심히 키운다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덮친 병마와 싸우면서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스스로 깨우쳤다고 이야기했다.  자기가 일을 하느라 시간에 쫓기지 않는 만큼, 주위 형제들과 자기 자식들에게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베풀어 줄 수 있다고 했다. 이 후배는 그때는 그때대로 맞고, 지금은 지금대로 맞게 살아가는 타입.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후배가 어른처럼 든든하였다.

  한 후배는 남편의 요구로 결혼초부터 전업주부가 되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팔 벌려 맞아주는 엄마가 있는 가정의 모습을 원했다고 했다. 목소리가 그윽한 그 후배의 아이들이 보냈을 어린 시절 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는 주지 못했던 것을, 이 후배는 베풀 수 있었구나 생각했다. 나는 어쩌다 팔자가 펴서 지금에야 전업주부로 산다고 신세타령을 하고 있지만, 미혼모였던 20대나 이혼녀인 30대에 나는 전업주부가 되고 싶어도 그리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 아이들에게, 내가 꿈꿔왔던 가정의 모습을 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고 내가 원했어도,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엄마 노릇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후배의 아이들은 집에서 엄마가 늘 기다려주었기 때문에 혹시는 그 아름다웠던 시간을 특별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후배는 엄마라면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귀중한 시간을 아낌없이 베풀었던 것이다.  후배의 아이들은 이제 모두 자랐고,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후배는 자식들의 뒷바라지에서 벗어난 지금부터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다른 한 후배는 전업주부로 살기의 가치를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2년 전, 특히 목소리의 힘이 좋고 마음이 밝은 게 눈에 띄었는데, 이런 저런 수다 속에 들려준 친정어머니의 이야기, 그 속에서 보이는 노부인의 삶의 태도가 딸을 그리 키워낸 것이라 여겨졌다. 그녀의 친정 어머니는 자식과 남편을 제일로 여기며 사는 전형적인 전업주부였고, 한국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 가족계획을 하던 70년대에 8남매나 낳아 기르셨다. 그 자식들을 키우려면 남편 혼자 버는 게 어려우니 맞벌이를 하고, 생활력 강하다고 알려진 제주도 여자라면 어떤 모양으로라도 돈을 벌러 나가는 게 보통이었지만 후배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직장을 찾거나 돈을 벌거나 하지 않고,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갖고 타고난다는 믿음으로 자식을 키웠다. 자식을 위해서 하는 일은 오직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후배의 어머니는 남편과 성당에만 의지해 살아가면서 8남매를 키웠고,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 슬픔에 함몰되지 않았다. 이제 그 어머니는 8남매를 잘 키워낸 자신이 몇 백 억 자산가 못지 않다고 생각해서, 여행을 가고 싶으면 자식들에게 골고루 부담을 지우신다 한다. 부담을 지우지만 어머니의 태도는 매우 유쾌하고 당당하다 한다. 그래서 후배의 형제들은 우애좋게 번갈아가며 어머니에게 선물을 하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끼는 일을 다투어 한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카톡의 사진으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후배가 들려주는 에피소드마다 귀여운 소녀처럼 등장하는 그 어머니가 나도 좋았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가장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그리고 거기서 강해지는 가족간 결속이야말로 주부로 사는 일을 보람있게 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수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직장을 다니는 후배와 선배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전업주부의 일을 해내는 동시에 직장일까지 겹쳐 해 내고 있었다.  조직의 성격상 어울리기 조금은 벅찬 직장 사람들과의 스트레스가 있고, 일을 하더라도 충분한 보수가 주어지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아이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열쇠가 되고 있었다.  " 아이가 있으니까" 아이들에게서 살아갈 힘을 얻고, 내가 노력한 만큼 아이들이 크고 있음을 믿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래다 주는 자동차 안에서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왜, 남편과 재혼하여 지내던 10여 년의 시간을 전업주부로만 살았다고, 또는 돈 벌이도 못했고, 사회적 지위도 그냥 동네 아줌마이기만 하다고 불평을 해대었던가. 가끔은 비오는 날 일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일을 만족해 하다가도, 시집장가를 가면서 집 문제로 고민하는 자식들에게 두툼한 통장을 내밀지 못할 때 우울하고 신경질이 났다. 너무 쉽게 일을 그만두어 버렸다고 후회하고, 그래서 저축통장을 못 만들어서 엄마노릇이 찌질해졌다고 심통이 났다. 그렇다고 교사 자격증 들고 나가 일을 찾지도 않았다. 자식들에게 돈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복권을 사거나 하지도 않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았으면서도 가정일을 똑부러지고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가사일을 소홀히 하는 만큼  보기좋게 내놓을만한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도저도 안 되고 밥 꿔다 죽 쑤고 말았다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내가 나를 질책하고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이들이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거울을 비춰보며, 나는 왜 이리 못 생겼을까, 매일매일 묻다 보니 정말 나는 못 생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나를 미워하지?


  어느 심리학자의 상담 사연을 들어보니,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전형이었다.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너는 참 못 생겼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가 내 내면 깊숙히 자리하고 앉아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음도 깨달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암세포처럼 독하게 퍼진듯했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기도 했다.

   습관이 되어 굳어 버렸으므로 쉬이 사라지지 않는 그 목소리와 싸우는 데는 꽤나 힘이 들었다. 불쑥 일어난 반발심이 '내가 진짜 못났어? 꼭 그리 미워할만큼 못 났냐고? 나는 어리석고 실수투성이로 살았던 사람이라 앞으로 살아봤자 되는 일이란 없는 거냐고? 그렇게 가치없는 사람이야? 뭘 해도 잘 안 되는 사람이냐고? " 라고 물으면,  하루는 막 화가 나서 강하게 대들었다가 하루는 기가 팍 죽어 못났음을 수긍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무얼하면서 사는지 정리해 보기로 했다.  나에게는 월급통장이 없었을 뿐이고, 주중의 오후 시간에는 직장일을 하는 사람처럼, 어떤 때는 공부하는 대학생이라도 된 듯이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공부를 했다. 늘 컴퓨터를 켜고 글을 적어 나갔고, 눈이 아프도록 글을 읽었으며, 사소한 풍경을 기록하고 싶어서 좋은 문장을 만들어 보려 하였고,  뿌리를 알 수 없는 생각을 붙잡고 그게 무언지 탐색했다. 그것은 내게 적어두어야 한다는 강박 상태를 만들었지만 지난 10여 년간 내 일상과 속내를 블로그에 기록하며 지냈다. 10년이 넘은 나의 블로그, 내가 죽은 다음에 아들이 읽을 이 유서에는, 내 아들이 자라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남편이 늙어가는 모습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버팅기며 붙잡았던 일상에의 애정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면이 목소리가 나를 질책한다고 해도 나는 계속해서 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근본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닌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매달리는 동안에 나는 내가 나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헛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민은 사실, 내가 돈을 못 벌고 있다는 데 있지도 않았고, 내 자식들 키울 때 엄마 노릇 못했으며, 이제 독립하려는 자식들에게 집 한 채 사주지 못하였다는 것도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물질을 안기는 일에는 내 의지가 거의 없었다. 또한  직장이 없고 사회적 지위가 없으니까 내가 동네 아줌마로만 살고 있다는 것도 내 고민의 핵심이 아니었다. 그러니 거기서 생긴 질문 또한 내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어느 자리엔가 앉아 책임을 두둑히 얹고 있는 상태를 매우 꺼리는 사람이지 않은가.


   진짜 문제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안 채 지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야 그게 뭔지 알게 되었다. 후배들과 이야기를 하고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 저녁에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뚜렷이 보여왔다. 산길을 걸었고, 따뜻한 밥을 먹고 선하고 건강한 사람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선물처럼, 내가 무얼 원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내 나이 53세에 원하는 걸 안다는 일은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 시간 동안 애써 온 것은 13년 전에 결혼한 남편과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던 해에 마흔이었던 나는 아이 낳기를 깨끗이 포기했었다. 아버지가 다른 두 자식 외에 세 번째의 아기를 결코 낳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정관 수술에 동의했고, 나는 그 동안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것이 부부 사이를 좋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내가 데리고 사는 아들은 의붓아버지를 따랐고, 성과 본을 바꾸어 남편의 자식이 되어 주었으므로, 그 일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부부는 돌아서면 남인데 그런 때  자식이 있어야 두 사람을 잇는 끈이 된다는 말을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우리 부부 사이는 생물학적 자식이 없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말 그랬는가,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남편과의 끈을 돈독히  할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 데 매우 동의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남편과 늘 함께 다니면서, 남편과의 사이에 애정 담뿍 담긴 자식을 낳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그 일을 하느라 다른 많은 일들( 내 직장을 갖는다거나, 저축을 한다거나, 사회적 지위를 위한 무슨 일을 한다거나) 을 포기했다. 기꺼이. 나는 남편과 함께 만들고 싶었다. 내 속을 다 내 준 그것을.


 그 일은 생물체로서의 출산이 아니라, 남편과 함께 내 놓는 책 출산이었다. 나는 마치 결혼한 부부 사이의 자식처럼 남편이 책을 출간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남편을 따라 다니며 조수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남편의 연구를 어깨 넘어 보고 나면, 꼭 내가 해 주면 좋을 일들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일본어를 배웠고, 첫번째의 책, <재일한국인과 창가학회> 그 부록< 숙명전환의 선물>을 함께 내놓았다. 그 책이 나온 지 올해로 3년 째, 마치 세 살 터울로 동생을 봐야겠다는 아기 엄마처럼, 나는 남편이 쓰는 책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작년에  내놓은 책 <남양군도> 에는 내 조력이 덜했다. 그래서 그 다음 책은 두 사람의 힘을 합쳐서 좀 더 발전한 책을 내놓고 싶었다. 그 욕망의 일환으로, 올해 봄에 출판사를 등록했고, 오래전에 태평양 섬으로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이 유서처럼 써 둔 기록물을 발견하고 책을 내 보려고 편집을 하고 있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나는, 많은 자식을 두고 싶어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가족 사이에 생긴 갈등에 흔들려 중심을 잃어 버렸던 모양이다. 그 사이에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건망증은 더 심해져, 내가 아이를 낳고 싶어하다는 마음 자체를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조차 까먹고 갈 길을 잃어 버렸던 것이고, 전업주부인 내가 한심하다는 식으로, 엉뚱한 데를 긁어대었다.

  이 글을 적으면서, 다시 허리 반듯하게 하고 앉았다. 눈이 맑아지고 길이 보인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을 담을 게 보인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