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日本語の勉強屋

번역: 사진 속의 가족사(아라가키, 오키나와)

자몽미소 2016. 11. 20. 17:54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전쟁때문에 고국을 떠나온 어머니)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전쟁 때문에 고국을 떠나온 어머니

 

글쓴이 :아라가키 야스코, 1946년 오키나와 헤이안좌섬에서 태어남. 지역사 편집에 종사하면서 이민과 전쟁에 대한 집필에 몰두. 개인적으로는 필리핀 잔류고아 문제에 전념. 신오키나와현사 편집위원, 제주와 오키나와를 잇는 모임의 회장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

 

200437, 오키나와 기노완 시내의 병원에서 필리핀 여성 한 사람이 영원히 잠들었다. 프란시스카 세나 아라가키 후미에, 향년 87. 내 어머니이다.

그 후 5 개월이 지난 8월에, 우리들 형제 5명과 배우자, 어머니의 손자와 증손자, 오랫동안 어머니의 친구들도 함께 해서 총 15명이 필리핀 여행에 나섰다. 여행의 목적은, 어머니의 유골 일부를 가루로 만들어 고향 바다에 뿌리는 것, 가족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우선 네그로스 섬으로 건너가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났던 작은 해변 마을을 방문했다. 그리고 815, 네그로스 섬을 출발하여 파나이 섬으로 가는 정기여객선 갑판에서, 어머니의 유골가루를 바다에 뿌렸다. 작게 나누어 쌌던 어머니의 유골가루는 금방 바람에 날려서, 이윽고 바다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들은 <네그로스의 자장가>를 불렀다. 어머니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어머니는 19161010, 네그로스 섬 상칼로스에서 태어났다. 44, 여덟 명의 형제 중 일곱 번 째이다. 한 살 때 아버지(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내 외할머니)는 같은 섬의 카데이스 라는 마을로 이사해서 옷을 만들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의 꿈은 음악교사가 되 것이었다 한다.

 

한편, 우리 아버지는 1917, 마닐라 마 재배 농업 이민으로 필리핀의 다바오로 건너갔다. 때마침, 다바오는 제 1차 세계대전의 호황기를 맞아 일본인 이민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3년 후에 파나이 섬 이로이로 시로 이주해 어업에 종사했다. 당시, 필리핀의 어업은 마닐라와 파나이 섬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고, 이로이로 일본인 어업조합의 중계지가 그곳에서 가까운 네그로스 섬에도 있었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굉장한 멋쟁이였던 것 같다. 외할머니의 옷집에 손님으로 다니던 사이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프란시스카와 결혼하게 해 주시면, 가족처럼 돌보겠습니다.” 라고 외할머니에게 사정을 했다. 어머니는 이 결혼이야기가 너무나 싫어서 도망을 다녔다고 한다. 외할머니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일본인이고 게다가 18살이나 연령차가 났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강요에 밀려, 193011, 어머니는 마침내 일본인 아라가키 壬秀의 처가 되었다. 아버지는 32, 어머니는 14세였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건 도둑 결혼이지, 지금이라면 범죄네.” 라며 어머니를 놀리곤 했다.

 

*전쟁-<집단자결>을 피하다

 

1941128, 미일전쟁 시작. 그 날 아침, 일본인은 필리핀 경찰에 연행되어 수용소에 보내진다. 파나이 섬의 일본인이 구출된 것은 일본군이 그 섬에 상륙을 한 다음 해 4월이 되어서였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령이었지만, 1935년에는 독립준비정부가 발족되어 10년 후의 독립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일본군은 그런 필리핀에 상륙해서 421월에는 마닐라를 점령하고, 이후 필리핀 전역을 군정 하에 두었다. 필리핀 측의 저항 게릴라도 각지에서 조직되었지만, 일본군은 일반 민중들에게도 엄격한 탄압을 가하였다.

파나이 섬에 있던 일본인의 생활도 확 변했다. 아버지의 어업조합은 군의 어용업자로 재편되었고, 남자들 일부는 게릴라 토벌을 위한 길 안내, 통역에 징용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전황은 악화일로에 들어가, 447월 사이판 함락 후, 필리핀의 일본인도 차례로 현지 소집되어갔다. 같은 해 10, 미군이 레이테로 역 상륙을 하자, 마닐라에서 시가전을 벌이던 일본군은 다음 해 452월에는 루송 섬 북부 산 속으로 퇴각을 개시한다.

파나이 섬에 미군이 상륙한 1945318, 일본군 수비대는 산속으로 퇴각하면서 지구작전을 편다. 같은 날 밤, 250명의 일본인 이민자와 군인이 행동을 함께 하여야 했다.

도피하며 헤매다 나흘째가 되던 321일의 늦은 밤에, '스야쿠' 라는 마을 정글 속에서는 노인과 부녀자의, 말하자면 <집단자결> 사건이 일어났다. ‘군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이라며 일본인회 간부가 결정했다고 하는데, 동회 회장 및 일본인 학교장이 권총으로 자살했다. 진상은 지금까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4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우리가족도 한동안은 그 끔찍한 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좀 쉬고 싶었다고 했다. 누워 있으면, ‘일어나, 일어나!’ 하는 목소리, 아버지였다. 도중에 교장 선생님을 만난 아버지는, 우리 딸은 걸을 수 있으니까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렇게 해서 (걸을 수 있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현장에 남은 부상병이 수류탄을 던졌는데, 여전히 죽지 않고 버둥거리던 사람들을 차례로 총검으로 찔렀다고 한다. 현장에서 10여 명의 어린이가 구출되었고, 그 중 세 명은 나중에 수용소로 돌아왔지만, 나머지 일곱 명은 지역주민에게 끌려가 감감무소식이라고 들었다.

패전 후, 일본인은 강제 송환된다. 필리핀에 남을 수 있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왔다.

나중에 내가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을 때, 어머니는 < 왜냐고? 그건 가츠코가 일본에 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장녀인 내 언니는 전쟁 당시에 (필리핀에 있는) 이로이로 일본인 소학교를 졸업한 후에, 가족과 떨어져 오키나와현립 제1고녀( 오키나와 제일여고)에 입학한 상태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전후와 나

 

나는 194611, 아버지의 고향인 오키나와 헤이안좌 섬에서 태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어업을 시작했지만, 태풍으로 배를 잃고 빚만 남았다. 나 다음으로도 여동생과 남동생 4 명이 태어나, 우리집은 <가난한 사람이 애만 잔뜩 낳은 집>이었다. 어릴 적 나는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응석쟁이였다고 하지만, 중학생 때부터는 일본어를 읽지도 쓰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반항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로 갔다. 내가 오키나와 출신이라고 하면 < 아아, 그래서 피부가 검구나. 그런데도 일본어는 잘 하네> 라면서 이상하다는 듯 반응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고혈압을 앓던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1973년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전쟁이 끝난 후 처음으로 파나이 섬을 방문했다. 그 여행에서, 전쟁 중 자결현장에서 구출된 일본인의 '잔류고아'가 확인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자,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그들 부모를 찾아주느라 동분서주하였고, 어머니는 필리핀에서 오는 편지를 번역하였다. 가끔씩 바지를 적시고 귀가하는 아버지에게 나는 이건 국가가 해야 할 일이에요. 왜 그 몸으로 돌아다녀요?’ 라며 성질을 내곤 하였다.

 

809, 82세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들에게는 거의 말이 없으셨던 어머니가 필리핀에서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는, 울며불며 고향말로 뭔가를 호소하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필리핀 말.

아버지의 1주기를 마친 그해,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필리핀으로 날아갔다.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는 모두들 가난할 텐데, 네가 실망하지는 않을까라며 우울한 얼굴이었지만, 도착 후에는 큰이모와 작은 이모, 사촌들에게 둘러싸여서, “얘가 파울라(*세례명)” 라고 기쁘게 나를 소개하였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의 고향을 5번 가량 방문했다. 아니, 나는 조사를 겸해서 갔기 때문에, 어머니가 같이 가셔서 나를 도와주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이민의 발자취를 따라가서, 일본인과 관계하였던 사람들로부터 체험을 들었다.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일이었다.

1996, 어머니와 마지막 여행을 하였다. 큰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고, 장례에 참석하는 어머니를 이번에는 내가 따라 붙었다. 사람은 언젠가는 생을 마친다. 눈물에 젖은 어머니를 보면서 불현듯 그 생각을 했다. “그때가 되면, 어머니의 유골가루는 고향 바다로 돌아가게 하자라고.

어머니가 필리핀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시아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필리핀·한국·제주도·오키나와공부해야 할 게 아직도 너무나 많다. “, 변했구나!” 라며 천국에 계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끔씩 들려온다.

 

각주(1)

현재의 미크로네시아 섬은 옛날에는 일본이 통치하며 남양군도라고 불렀다. 그 사이, 수많은 일본인이 돈을 벌기 위한 이민으로 그곳으로 보내졌고, 수산업이나 사탕수수 농업에 종사했다. 이민의 중심지인 사이판에는 약 2만 명의 일본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4615일에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을 개시하였다. 4만 명의 수비군은 섬 북부로 쫒겨가다가 결국에는 77일에 전멸했다. 민간인의 희생이 매우 컸다. [본문으로]

 

각주(2)

아시아 태평양 전쟁 전에 발표된 전진훈 (戰陣訓)속에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지 말고' 라는 말이 있다. 군인은 포로가 되지 말라는 말이다. 전쟁말기 전쟁터에는 비전투원인 민간인도 포로가 되지 말라고 가르쳤다. 적에게 잡히는 공포심 때문에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서 자결했던 것을 '집단자결'이라 한다. 최근에는 '강제집단사' 라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본문으로]

 

* 본 원고는 계간지 쥬반스2005년 가을호에 게재되었던 졸고 <계속하여 말하는 전쟁의 참상>을 가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