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책읽기]

자몽미소 2003. 4. 13. 05:30

제주의 사월은 고달프다.

가지 끝마다 환하여  나무 아래서 정신 혼미하게 하던 벚꽃은 어느 아침 바람에 사방으로 흩날리고, 눈꽃처럼 사그라드는 그 꽃 옆에서 '툭' 무겁게 땅으로 치닫는 붉은 동백이며,  벌이 윙윙거리는 유채꽃밭 속에서 동지를 꺾어 입안에 넣으면  먼 데서 숨어있던 것들이  몸 속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노랗게, 붉게, 희게 오는  먼 먼 기억들은  해마다 새 꽃으로 와서 이내 사라지곤 했다. 무엇일까, 붙잡기도 전에 하늘 위로 날아가고  땅으로 곤두박질 치며 단단한 껍질 속으로 숨는 이 기억들은.

이 책의 저자 현기영은 제주 섬의 역사에 관해, 섬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 그래서 이 섬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이 섬과 내가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해야 하는지를 일생을 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소설집 『순이 삼촌』/1979 에서부터 『아스팔트』/1986, 『마지막 테우리』/1994,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1983, 『바람 타는 섬』/1989, 수필집『젊은 대지를 위하여』/1989,  최근의 산문집 『바다와 술잔』/2002  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 섬은 그의 글 쓰기의 화두였다.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4월의 제주 항쟁을 바라보는 어린 소년의 성장소설이며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장두의 최후’ 편에 소개된 이덕구의 마지막 모습에서 제목을 따 온 이 책은 유년의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어 나오다 4․3을 즈음해서는 이야기가 많아지기도 한다. 험난했던 시간을 견딘 가족들의 이야기며,  불길처럼 타오르는 폭력의 와중에 이 소년이 가난과 외로움을 극복해 가며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읽고 있노라면 한국의 근 현대사의 질곡에 이 지역의 공동체가 어떻게 수난을 당했는지, 또한 그것이 각각의 개인들의 삶을 어떻게 유린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많은 생명들을 앗아간 부끄러운 폭력의 시대가 모든 개인의 영혼을 짓밟아 버릴 수는 없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공간은 50-60년대의 제주읍내이지만  글 속에 보여지는 풍광과 사람 이야기, 순수제주토박이 사람들이 생활습관은 70년 이전에 태어난 제주 사람이라면 함께 공유할 있는 추억이기도 하다. 가난했지만 누구나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여름 바다에 뛰어들며 발가벗고 놀아도 즐거움이 파도같이 출렁이던 시간들.
이미 오래 전에 이 섬을 떠났던 작가는 이제 돌아와 이 땅을 밟아 본다. 과연 어디로 떠나 있던 것인가. 많은 이들이 떠나갔고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수탈의 섬도 유배의 섬도 붉은 피의 기억을 숨겨 놓은 침묵의 섬도 아닌 이 낯선 땅은 과연 그에게 무엇인가, 떠나 있어도 늘 가슴속에서 출렁이는 바다와 바람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 물음을 위해 작가는 이 책을 쓴 것 같다.
한 생애를 살기에 고달픈 이들은 돌아볼 일이다. 이 섬의 4월처럼 어떤 풍경, 어떤 시간에 대해 타인들이 보는 것과 달리 또 다른 것이 보이는 이들은 고요히 돌아볼 일이다.

이 책의 작가에게 4월은 그의 어깨에 매어진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 짐을 벗고 싶었으므로 그를 작가가 되게 하였던 게 아닐까 , 한 생애를 다해 말해야 할 것들, 말해야 한다는 그것은 책임감에서 오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나오는 것이며  문학에 대한 신념이나 절실함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생애를 붙잡고 고달프게 하는 것들은 가끔 어떤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 2003|04|13 05:2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