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주제-2008년의 책읽기 18

자몽미소 2008. 3. 7. 19:08

 

주제- 강유원 서평집, 뿌리와 이파리

 

 

 

 

이 책의 주제는 여섯 가지이다 즉,책과 교양, 역사, 근대, 파시즘, 전쟁, 한국과 동아시아 에 관한 책을 고르고   서로 다른 제목으로  1권- 3권의 책을 뽑아 서평을 했다. 

이전의 글, <책>보다 읽기에 어려웠던 건, 이 책에 담겨진 책 중에 읽어 본 것이 몇 개 없었고, 읽으려고 사다 둔 책들도 있었지만, 여간해서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이어서 책읽기를 미루고 있던 이유도 있었다.  내가 이미 읽은 책을 평한 글은 꼼꼼히 읽었지만, <신곡> 처럼 제목만 알고 있는 책은 그의 글인지 원저자의 글인지 혼동될 때도 많았다. 그런 혼동은 다른 책 소개에서도 많이 일어났다. 그의 글이 읽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책에 대한 서평집인 이 책을  읽기 힘들다는 느낌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사서 읽고 싶은 생각은 없던 책을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서평을 읽고 꼭 이건 읽어 보아야겠다 싶은 책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지난 번 <책>과 달리 이번 책 <주제>에서는 사 봐야겠다 생각해 메모해 둔 책이 몇 개 안되었다.

 

여기에 모아 놓은 주제들이 그렇다. 교양과 역사 는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지만 근대와 파시즘의 주제에 묶여진 책들은 서평에서 이미 질려 버렸다. 왠만한 배경 지식이 없이 소개한 책들을 읽을 수는 없을 터인데, 서평이니 더 그랬다. 나에게 근대와 파시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무리 좋다고 알려진 책이어도 <성찰>이 없는 책, 즉 인간 삶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을 비판한다. 그 예는 다치바나다카시 였다. 지적허영을 위해 글을 쓴 자, 지식이 되는 글을 쓰고 본인도 지식인이 되었지만 <성찰>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교양>을 쌓기 위해 책을 읽은 행위에  대한 질문을 재차 던진다.

나로서는 다치바나 다카시 본인의 책읽기 소개인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나 달여행에 참가했던 우주비행사와의 인터뷰를 글로 써낸 <우주로부터의 귀환>을 읽으며 대단히 흥미로운 글쓰기, 아는 것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의 지은이의 평가에 반감이 일기도 했다. 

누군가의 글을 비판 하는 것은 독자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사람이 그러한지 그의 글이 그러한지 애매하게 <경박한> 이란 말을 붙이면서까지 그를 폄하할 필요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다른 글에서도 그의 말투(글투가 맞을까, 글에 쓰여진 말투라고 해야할지도)  중에 걸리는 것은 형편없는 책이라고 판단한 후의  원 저자에 대한 평가에 다소 혹독한 단어가 붙여지기 때문이다. 비판 받는 이가 몹시 기분이 상해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처음 그의 글을 읽을 때는 겁없이 자기 생각을 단호하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아 장점으로 보이던 것이 여러번 그의 그런 식의 폄하하는 말투를 읽다 보니, 그게 바로 이 사람의 단점처럼 보인다. 딱부러지게 깍아내리지 않아도 그 앞에 이미 써 놓은 표현으로 독자가 다 알아들을텐데. 독자의 글읽기도 염려하는 것일까? 딱 부러지게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독자를 상상했을까?

 

이 책의 저자에 대한 또하나의 아쉬움은  이 책의 한 주제인 <한국과 동아시아> 편을 쓰면서 제주 4.3에 대한 언급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4.3 을 소재로 낸 책이 변변치 않아서였다고만은 볼 수 없다.  일제 청산을 하지 못한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반공>을 뒤에 업고 그들의 권력을 폭력으로 만들어 갔던 예로서, 또 그 때의 학살을 4.3 처럼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게 없을텐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어째서 한국과 동아시아의 주제에 <제주도 4.3>이 언급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이 책, 한국과 동아시아 편엔 광주학살만을 한국전쟁 이후의 최대 학살로 이야기 하였다. 작은 제목인  <한국 현대사의 공포> 편에 채택된 책은 한홍구 씨의 <대한민국 1,2>이었는데 사실 읽어보면  그 책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자신의 생각, 즉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포가 역사와 밀접한 것임을 말하고자 논증했을 뿐이다. 거기에   제주 4.3 발발 60 년이 지나도 빨갱이로 몰리는 일이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 여전히 횡포하는 자유총연맹등의 우익 들이 있다는 현재의 일을 그는 왜  말하지 않은 것인가 못내 아쉬웠다. 

 

 

이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 사관에 입각해서 다른 이의 글들을 읽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 소개된  책들이 비판받을 때 공통점을 찾아보면 원저자의 판단이  그 사회의 토대인 경제적 문제를  파악하지 못했을 때 일어났다. 이 점은  나도 그의 판단에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그의  관점을 참조해서 다시 책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덮으며 나도 그처럼 삐딱해지는 게 있다. 그것은 이 책의 서문에 쓰인 그의 말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 왕>, <신곡> 과 <정신현상학>. 이 책들 중에서 <정신현상학>을 제외하고는 원어로 읽어보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기원하여,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두 권 정도 더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죽은 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머지 두 권을 읽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걸린다.

그가 이 책의 처음에 거론했던 다치바나 다카시를 일컬어 지적허영심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폄하했던 것이 내 머리 속에 오버랩되면서 나는  똑똑하기 그지 없는 이 사람보다는 떠벌이 일본 남자가 솔직히 더 마음에 든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이 세상의 책이라고 불러준 책들 몇 개,  원서로는 물론 한국말로도 저 위에 소개된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으니, 나는 이 남자 앞에서 무지막지 쪼그라드는 것이다. 그의 서평집을 가지고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 어떤 계기로 그가 나의 이 글을 봤다면 그는 그의 많은 글에 포섭되어 짜그라진 깡통이 되어 버린 저자들처럼 이 형편없는 아줌마를 어떻게 짜그라버릴지 몹시 두렵기도 한 것이다.

내가 이 블로그에 소개하는 서평을 그가 볼 리는 없겠고, 내 글이 그만한 가치도 없으니 무슨 해야 있을까만은, 나는 그럼 책이라고 불리지 못하는 것들만 읽는 사람이구나 싶은  부진아 된 감정이 생기고, 엘리트, 공부 잘하는 사람 앞에서 느끼는 자격지심이 마구 드는 것이다. 그의 서문을 읽을 때 그랬다. 결국,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단테의 <신곡>을 재미없어 못 읽을 것이고, 그는 죽었다 깨어나면 그 책을 한국말도 아닌 원서로 읽겠다지 않는가,

 

<주제> 라는 책은 그래서 책읽기와 글쓰기에 관해 내 <주제 파악>을 도와 주는 책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내가  이 엘리트 지식인에게 팍 꼬구라질 마음은 크지 않고, <너 잘 났어!> 하며 튕기는 마음이 생기는 걸 보니, 나는 앞으로 또 나 좋을대로 책을 고르고 그의 서평은 조금만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엘리트가 아닌 나에게 이 책이 주는 일종의 선물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