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영화 映画の話

묵은지 꺼내듯 영화 감상

자몽미소 2009. 2. 10. 16:07

 

 

오래전에 본 영화-주홍글씨 [영화읽기]

 

영화 [주홍글씨]--여성성의 새로운 상징으로서

 

사춘기 시절에 방학숙제로 읽었던 [주홍글씨]를 연상하며 극장을 찾았다. 원작이 중고교생의 필독서임였음을 상기한다면 극장 앞에 붙여진 <미성년자관람불가>는 왜! 무슨 장면이 있는 거지! 하는 작은 궁금증을 갖게 했다.

영화가 열리자 인디언들의 장례장면이 나타난다. 화면을 메우는 거칠고 야성적인 얼굴들과 자연의 모습이 장례 의식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원주민의 추장이 죽은 것이다. 이 시기는 영국 청교도들에게 이상향으로 알려진 아메리카 신대륙이 정복되고 있는 시기였으며, 원주민과 정복자 들은 서로의 믿음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 영화에서 인디언 추장의 죽음은 원주민들에게 대륙정복자에 대한 불신의 싹을 티우는 계기를 마련하며 이와 같은 복선은 영화 말미에 하나의 해결점 내지는 경계를 긋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 (헤스터 프린과 목사 딤즈테일) 의 딸인 퍼얼의 눈을 통해 읽혀 나간다. 원작과는 상당히 다르게 표현된 영화의 상징성은 이 영화의 화자가 주인공들의 딸인 퍼얼에게 있으며 이 화자는 새로운 주인공으로서 탄생된다는 데 기인한다. 이 영화가 [주홍글씨]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하려 하는 것은 원작이 제 3자의 눈 (그것도 남자에 의해)을 통해 이루어졌던 기존의 해석에 반대하고 [주홍글씨] 사건 자체를 보다 진실된 눈으로 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원작이 여주인공의 참회의 세월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의 인생 차체를 죄악시하는데 동의했다는점에 미루어 보면 이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의 참회는 논리에 맞지 않는 억지 해석이 되고 만다.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와 신념, 정서에 충실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여성으로서 원작에서 그리려 했던 여성과는 아주 다르다. 원작의 여성이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파생된 허구적 인물이라면(죄의 댓가는 인내와 자비로써 이겨낼 수 있으며 죄를 사함받기 위해 끊임없이 불평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여자의 사랑을 불륜이며 죄악으로 본 것)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성회복의 차원에서 그려지고 있는 여성성의 상징이다. 여기에서의 여성성이란 남성성의 대립적 개념이 아닌 인간성으로서의 여성성을 말한다. 이러한 주인공을 그려내기 위해 이 영화는 딸인 화자를 필요로 했으며 딸을 통해 어머니를 보는 형식을 취했다.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초기의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지배 질서를 요구했다. 카톨릭교의 부조리에서 벗어나고 이상향을 건설하려고 찾아온 신대륙에서 사회조직의 구성에는 또다시 다른 측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용한다. 지배질서의 구축에 조금씩 서로 다른 문화의 수용은 새로운 질서에 위협이 될 소지가 있으며 여기에서 갈등이 야기되고, 그러한 갈등은 원주민과 정복자의 갈등 또는 신교도간의 의견의 차이 등으로 나타난다. 문화의 차이는 사고의 차이를 포함하며 사고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내포한다. 가치관의 차이는 사상의 차이를 그리고 삶의 양식을 달리 하게 한다. 이러한 문화차이의 극복은 새로운 대륙에서의 커다란 난제일 수 있으나 내재된 힘으로 말미암아 폭넓은 문화로의 변화도 가능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문화의 극복단계에서 부딪힌 갈등해결노력의 결과가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한 희생물을 탐색하고 이용하게 되는 위정자들의 악행과 부당함을 보여 줌으로써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적 욕구가 어떻게 고난을 맞게 되는가 보여주면서 동시에 시대와 함께 해야 하는 현실로서의 삶을 변화시키기가 또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보여지고 있다.

여주인공 헤스더는 이사를 온 후에 아름다운 산새의 노래소리에 홀려 숲 속으로 들어간다. 숲 속에서 한 남자가 물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그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아둔다. 헤스터는 안식일날 마차를 몰고 가다가 마차 바퀴가 길에 빠지는 바람에 곤란을 겪었다 그때, 숲 속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던 남자에게서 도움을 받았는데 그 남자는 목사였으며 서로 강하게 끌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헤스더는 그의 강연하는 모습 또한 신비한 체험으로 가슴에 담아 둔다. 목욕을 하며 그녀는 숲 속에서 본 아름다운 남자의 몸을 음미하고 그 남자의 지성에 찬 눈동자와 모습을 회상하며 자신만의 사랑을 가슴에서 불태운다.

남편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전갈을 받은 날, 헤스더는 남편이 죽기를 기다렸다고 말하고 목사와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부인들과의 사교 모임에서 성경이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발언으로 이단으로 몰림과 동시에 임신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녀의 고난은 시작된다.그녀는 고통속에서도 자기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찾아 왔으나 남편은 증오심에 불타 자기의 아내와 목사를 더욱더 고통으로 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남편은 마지막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원주민들의 분노를 이끌어 내는 매개역할을 함으로써 헤스더를 마녀로 몰리게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주인공들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데 우연이 작용하도록 하는 계기도 제공하였다.

원주민들과의 한 차례의 전쟁은 많은 죽음들을 남게 한다. 그러한 삶의 질곡은 치열했던 감정들을 쉽게 잊도록 하는 것인지 전쟁후 주인공들은 그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설정되고 가슴에 달고 다녔던 주홍글씨는 화자인 딸에게로 잠시 쥐어졌다가 마차가 떠남에 따라 길위로 버려지는 것으로 단락지워진다.

그러나 마차가 멀어지면서 화자는 말한다. 아버지인 목사는 그 후 몇 년 못 살고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형벌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후 혼자 살았고 다시는 사랑하지 않았는데 그것 또한 사람들은 형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얘기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화자인 딸은 말한다." 신 앞에서 죄악이 있을까"

화자의 시선은 어머니가 가진 여성성의 승계자로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과 같은 맥락에서 통한다. 어떤 지배나 권력도 진실로 인간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에 앞설 수 없으며, 신의 이름을 내세운 이데올로기일지라도 진정한 인간으로 서고자 하는 존재 앞에서는 부당한 억압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주홍글씨의 상징이 현대적으로 새롭게 모색되고 탐구되었다 하겠다. 현대성의 모색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 각자의 삶을 충실히 하려는 움직임, 각자의 삶의 양식이 스스로 튼튼해야함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스스로 자기 삶에 주도적일 때라야만 진실한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꿋꿋이 뿌리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12월

 

 

 

타임머신-미래를 바꾸는 힘 [영화읽기]

 

타임머신의 재해석/-미래를 바꾸는 힘은 사랑이다.

 

 

내 가장 좋아하는 제레미아이언스가 언제쯤 모습을 비치려나 기다리며 본 영화다

줄곧 1800년대말의 한 과학자가 사랑을 잃어 상심하는 장면이 계속되었고 영화의 장면은 1980년대의 상황에만 머물러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았다.

아이와 영화관을 찾으며 별반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제레미아이언스의 역이 어떤 것일까에 대한 일말의 궁금증으로 영화를 본다는 게 그를 기다리는 꼴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오다 보면 이 영화가 이야기 하는 몇 개의 주제가 눈에 띄게 마음에 자리잡게 되리란 걸 알게 된다. 그것은 달의 몰락과 상관이 있다.

어느 일본작가의 소설 이름이던가 "달의 몰락"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과학자 (이름: ), 그는 애인의 사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과거의 그 어이없는 상황을 바꾸기 위한 획기적인 기계를 만든다

애인이 죽고 4년이 흐른 뒤 그는 타임머신을 만들었고 전날 애인을 만나 구혼을 하던 그 시간과 장소로 돌아간다. 그의 회한은 너무나 깊어서 전에 공원에서 어이없이 강도에게 애인을 빼앗겼으므로 그 장소만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애인을 죽게했던 한적한 공원을 떠나 도심으로 들어왔어도 그의 애인은 도심의 마차에 치어 또 한 번 죽고 만다.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미래를 향한다

첨단 도시에 내린 그, 획기적으로 바꾸어져 버린 2030년대의 도시 모습에 우리 또한 아연하지만 그곳에서는 미래를 이야기 하며 달에로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달은 지난날 우리가 가졌던 낭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유흥이거나 사업이었다. 미래는 날이 갈수록 최첨단의 문명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의 타임머신 또한 그 속도로 달려나간다. 다시 미래로 미래로.

그러나 그는 전혀 예상외의 미래의 시간에 도착하는데, 그 시간에 지구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지구방위특공대가 말한다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 달의 지나친 개발로 달이 폭발하고 있다. 달이 폭발하면서 지구도 폭발 지경이다. 그는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을 빠져 나오며 정신을 잃은 그는 타임머신의 시간 조정장치를 놓치고 말고.

몇 번의 빙하기를 포함한 거대한 지구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은 관객으로서는 흥미있는 볼거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80억년 후의 세계에 와 있다. 이 곳은 참으로 기이한 문명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 봤던 어떤 가옥의 형태도 이 괴상한 가옥의 형태로는 만들어 보지는 못했을 구조의 집들,마치 나뭇가지에 붙어 기생하고 있는 벌레의 집처럼 절벽 위에 따닥따닥 붙게 만든 이 집은 아마 이 영화가 펼치고 싶었던 상상의 나래 한 자락쯤 되려나.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언어를 가졌으며 어른이라고는 없는 이상한 생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하 함구하였으며 밤마다 꾸는 악몽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처럼 그들은 잊고 있다가도 어느 틈엔가 사라지게 될 운명의 생명체로서 이상한 폭력의 공동운명 앞에 무방비 상태였다. 달의 몰락이후 지구는 두 개의 생명체로 각각 진화를 한다

하나는 지상에서 하나는 지하에서.

지하의 생명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며 미래를 꿈꾸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괴상한 얼굴로 괴상한 몸으로 살고 있었고 지하의 세계에 갇혀 자신을 보지 못하는 존재이다. 생각이 없는 존재, 다만 어떤 운영의 힘에 굴복하여 살고 있는 생명들이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단 한 사람.

질기고 강건한 생명이었는데(그가 바로 제리미아이언스다) 그는 지하의 이 생명체를 이용해 지상의 생명을 유린하고 있었고 지상의 생명은 지하생명의 종족 보존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있었다

죽음과 어둠의 생명을 위해 밝음과 꿈의 세계는 유린되고 있었다. 그것은 오랜 동안의 관행이었고 달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였다. 우리가 꿈을 말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에 오는 피페함이 그런 것일까

제레미 아이언스는 이 지하세계의 시스템운영자였다.

그는 말한다

인간을 망하게 한 건 단 하나의 단어였다

그것은 바로 "만약에" 라는 말이라고.

만약에 라는 말에 이끌려 80억년의 미래를 보게 되는 악몽을 보고 있는 인간은 스스로의 모순덩어리이며 80억 년 후의 끔찍한 미래 또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모순이라고.

괴상한 얼굴을 한 이 미래의 남자는 바로 80억년 후의 미래가 된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

미래를 꿈꾸는 건 희망이지만 미래의 시간에 자신을 혐오하게 될 걸 안다면 더 이상 미래는 꿈이 아니다. 과거의 모순과 미래의 모순의 대결. 가까스로 그는 타임머신 기계를 이용해 자기의 시간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문득 그를 멈추게 한 것은 그가 불시착하였을 때 그를 도와 주었던 한 여자.

미래의 시간과 지하의 감옥에 쇠사슬로 갇혀 있는

그녀(이름: )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결론.

그녀를 구하자

곧 미래를 바꾸자.

미래를 바꾸어 그녀를 구하고 다시 미래도 구하고...

결국 영영 그는 자기의 시간으로 돌아오지 못하지만

과거의 남자는 미래로 들어가 사랑을 찾았다는 것.

미래를 여는 힘은 사랑이라는 것

달의 몰락이 와도 사랑의 꿈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타임머신이 보여주는 영화의 낭만이다.

지난 날에 대해 괴로워 한다면 이제 먼지 툭툭 털어볼 일이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미래를 바꾸어 보자. 꿈의 몰락이 없다면 당신의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그것의 힘은 사랑에서 온다. 사랑을 하자. 그대와.

 

# 2003년 03월 29일 [토] 20:21:59 봄빛물든

 

영화 오버더 레인보우 [영화읽기]

 

오버 더 레인보우란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내 가슴 아래 쪽으로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어쩔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한다.

복병처럼 모습 드러내는 그때마다

어떤 일기예보도 맑음은 없고

손에 든 우산조차 힘없는 방패

오늘과 내일 또는 지금과 아까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툭 건드리면

어김없이 범람할 모양인지

옷을 사 달라는 아이의 청으로 들어간 옷가게에서

거울에 비친 나는 눈이 붉다.

거리에 채워진 어둠으로

붉은 눈을 지우고 돌아온 집에선

내 몸 속에서 오래 타고 있던

마른 쑥의 연기 냄새

향기롭던 기억을 놓칠까 두려운

슬픔의 냄새.

내 몸에 퍼진 기억의 흉터처럼

거부하고 싶어서 안달나는 초라한 냄새.

정돈할 주인을 잃었는지

보살핌을 받지 못한 내 집은

들꽃같던 단정함 대신

무관심의 곰팡이가 곳곳에 배어있고

곧 무너질까 휘청하는 사이

허술한 벽으로 무표정의 무늬만 가득

비 온 뒤의 햇살의 흔적은

무지개를 잃은 방에서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