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영화 映画の話

더 리더- 말과 글의 경계에서 어떤 인생

자몽미소 2009. 3. 31. 15:15

 

 

 

 

영화를 보고 나서-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카톨릭 기도서의 주님의 기도를,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렸다.

 

성당에 다닐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하겠으니 내 죄를 용서하시란 간구를 할 수 없다.

내 죄는 용서를 해 주시라 빌지만, 그의 죄를  아버지 하느님께서 용서 하시겠다면 그것도 할 수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내게 잘못한 그를 나는 용서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이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 것인가. 이미 나는 그때 가슴에 상처를 받았으니 상처가 아물었다 해도 과거의 그 순간들, 떠올리고 싶지 않았으나 떠오르는 사건과 장면들이 내 살아 생전 기억의 저장고에서 사라지게 할 수나 있겠는가, 죽어 없어지지 않는 다음에야.

 

영화는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중심 소재로 하고 있다.

한 여자가 그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고, 그는 전 후  전차의 차장이 되어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 도시의 또 한 쪽에 살고 있던 소년이 그 여자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소년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그러나 소년은 어느 날 무섭게 화를 내더니  갑자기 떠난 그 여자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왜 떠났는지도 전혀 알아낼 수 없었다.

 

여자는 소년이 법대생이 된 몇 년 후에 다시 소년 앞에 나타났다. 여자는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한 여자의 고소로 법정에 서 있었다. 수용소에서 감시원을 했던 여자는 재판이 진행하는 논리의 비약으로 살인을 하기 위해 감시원이 되었다는 결론으로 내몰린다. 여자는 무기징역을 받았다. 소년은 그 재판의 부조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서지 못한다. 소년에게는 사랑했던 여자, 갑자기 떠나갔던 여자가 아우슈비츠의 감시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러나 그 후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마음을 여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을 하였으나 버림을 받았던 과거 때문이었다. 그 상처는 그 여자가 만든 것이었다. 

 

결혼은 이혼으로 끝나고 다시 혼자가 된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책을 읽어 주게 되었다. 

 

20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소를 하게 된 여자를, 남자가 찾아갔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감옥에서 어떻게 달라졌나요?>

여자는 <글을 알게 되었다> 고 했다.

글을 알게 된 여자는 출소 날 새벽 자살을 했다.

 

말을 할  수 있고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여자에서 글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게 된 여자로 변신하는 과정에는 그 남자, 책 읽어 주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사랑이 없었다면 여자는 글을 접하지 못하고 글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자살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글을 알기 전 여자는 재판 과정에서 왜 자기가 죄인인지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한 일이 왜 죄의 범위에 해당하는지를 잘 알 수 없었으므로 자신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녀가 부끄러웠던 것은 자신이 수용소에서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받는다.

 

글은 또, 어떤 무기가 되기도 하였다.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녀가 커서 자신의 체험을 책으로 엮었기에  패전 몇 년 후에는 그 여자를 기소할 수 있었다. 재판은 책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약자였던 소녀는 자신이 쓴 책을 들고 나와 수용소 감시원이었던 여자를 향해 섰다. 사람들은 그녀가 쓴 책을 읽으며 분노하였고, 책을 읽지 못하는  감시원인 그녀를 향해 질타를 한다. 그녀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하였다는 증거는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게다가 불이 난 교회의 문을 열지 않았던 그 날의 일을 기록한 사건 경위서가 있었는데 그 글은 그 사건의 모든 책임이 그녀 탓이라고 적혀 있었다. 글을 모르는 그녀가 쓴 경위서였다. 

 

그녀는 유언으로 그녀가 평생 모은 돈을 책을 낸 수용소의 그 소녀에게 전해 주기를 부탁한다. 남자는 그 돈을 갖고 미국에 살고 있는 여자를 찾아간다. 여자는 수용소의 경험이 평생의 트라우마였음을 거듭 말하며 감시원이 죽었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용서 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다만 죽은 그녀가 최근에야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남길 뿐이다. 누군가가 누구의 잘못을 징계하는 일의 정당성이란 늘 한결같지는 않은 것이다. 이제 용서는 살아 있는 그녀가 죽은 그녀를 향해 빌어야 할 차례 같지만 그러고 보면 용서와 잘못의 주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잘못한 누군가의 과오에 대해서 나는 용서를 할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잘못을 하고 있고 끊임없이 나는 용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몫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내 권리인양 해 왔던 것은 아닌가. 사람의 일에 있어서 죄와 용서는 사람이 믿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영역에 있는데도 우리는 그걸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님에게조차 저런 기도를 올렸단 말인가,

 

 그녀의 외로운 감옥방 안에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순간은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희열하는 순간이었을 것 같다.  생의 비의를 깨닫게 하는 글이라는 문을 통과한 후에 그녀가 선택한 것이 새 삶이 아니라 새로운 죽음의 세계라 할 지라도 그녀는  죄와 용서와 사랑에 관한 통찰을 하고 이 생을 마친 것 같아 그녀의 죽음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책- 즉 그녀가 직접 읽을 수 있는 글이 없었다면 그녀는 사나 죽으나 다름이 없던 생이었을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다시 곰씹어 이 영화를 생각하다 보면, 정치적인 시선으로도 이 영화를 보게 된다

수용소의 이스라엘 소녀는 커서 미국에 살고 있는데, 이 상황은 미국의 경제를 움켜쥔 이스라엘 세력의 상징처럼 보이는 것이다. 전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독일의 반성을 촉구하며  전세계 사람들에게 아우슈비츠를 이야기 했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관해 영화를 만들고 책을 만들며 지속적으로 독일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그런 이스라엘의 태도가 항상 정당한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너희 이스라엘은 너희에게 잘못한 이를 심판할 권리가 있는가, 그 태도 속에  이미 새로운 죄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이즈음의 이스라엘 국가의 행태를 보면 아우슈비츠를 경험하면서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를 알 수 없다. 수용소는 수용소였을 뿐이라며 성찰은 가해자나 할 일이지 피해자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는 일마저도 고통이라고 항변하는 영화 속 수용소 여자(이스라엘 여자)처럼 현대의 이스라엘은 과거 자기들에게 잘못한 이의 잘못은 절대 잊지 않으면서도 현재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는 신의 이름을 부여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가 이웃 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 전쟁 때의 독일 보다 못할 게 없다. 독일군이 뽑은 감시원 일을 하였던  여자는 고전을 읽은 후 자신 삶을 죽음으로 벌하였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이스라엘 여자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절대 부정하고 당당한 피해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원작- 책 읽어 주는 남자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 김재혁 옮김 | Shlink, Bernhard 원저자

 

출판사  이레

 

 

 

 

책꽂이에서 뽑은 이 책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다

 

책 갈피엔 이런 메모도 있건만, 책 내용은 거의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