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영화 映画の話

영화< 코러스>와 <킹콩을 들다>

자몽미소 2009. 7. 6. 14:10

 영화상영표에 <킹콩을 들다> 를 읽었지만, 여름이면 주로 나오는 아이들 킹콩영화인줄로 생각했다. 그러다 아들에게는 <공룡을 들다> 라고 제목을 바꾸어 말하기도 하였다. 신문의 영화평을 읽고 봐야겠다 생각했고 어제 영화를 보았다( 2009년 7월 6일)

 

 

영화, <킹콩을 들다> 를 보다 보니 프랑스 영화 <코러스>가 떠오른다.

요즘도 가끔  <코러스>의 음악 씨디를 들으며 가슴 서늘해지도록 아이들의 목소리에 감동하곤 하는데,  <코러스>의 핵심이 음악에 있었다면 <킹콩을 들다>는 운동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이야기가 끌어 내는 감동은 서로 닮았다.

좌절한 인간의 새로운 희망 찾기, 그러나 찾아오는 갈등, 그리고 오랜 세월 후에 남아있는 것은 사랑의 성장, 이라는 도식이지만 사랑과 희망이란 사람이 살면서 꼭 필요한 것임을 재확인하게 되는 이야기는 거듭 말하고 반복해서 들어도 마음을 울리게 되는 모양이다.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VideoView.do?movieId=40391&videoId=8137

 

코러스 동영상 

코러스 (2004) Les Choristes The Chorus

코러스

드라마 | 프랑스, 스위스, 독일 | 97 분 | 2005-03-03
77회 아카데미시상식(2005)
후보
외국어영화상
62회 골든글로브시상식(2005)
후보
외국어 영화상
실패한 작곡가와 꿈을 잃은 아이들
이제 그들의 희망 합창곡이 울려퍼진다!


성대한 클래식 공연장. 수천의 청중을 사로잡는 교향악단의 지휘자 모항쥬에게 옛 친구 페피노가 찾아온다. 오래된 낡은 일기장을 들고서. 모항쥬와 페피노는 60여년 전 여름, 한 대머리 선생과의 만남을 떠올린다.

“1949년 1월 15일
여러 직장을 전전한 끝에 결국은 막다른 곳까지 오게 됐다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최저기숙학교
‘최저’란 말이 나랑 너무도 잘 맞는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작은 기숙사 학교. 면회가 되는 토요일마다 교문 앞에서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는 전쟁고아 페피노, 역시 아빠의 부재 속에서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썽을 일으키는 모항쥬. 이처럼 쓸쓸한 여름방학을 보내는 아이들의 학교에 미완성의 악보를 든 마티유가 임시직 교사로 부임해온다.
마티유는 부임 첫날부터 아이들의 거친 장난과 교장의 비인간적인 교육을 맞닥뜨리게 된다.
상처 받은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 학교는 엄한 체벌과 규칙으로 강압적인 교육을 실시한다. 여름이지만 겨울보다 더욱 차가운 교정, 하지만 마티유는 그곳에서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다.

“서툴렀지만 분명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목소리도 그 안에 있었다. 아이들에게 뭔가 해줄 수 없을까?
작곡은 두 번 다시 않기로 했지만, 이 결심은 바꾸어야겠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취침을 확인하던 마티유는 우연히 아이들의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듣는다. 그는 그날 밤 접어두었던 오선지를 꺼내어 다시 음악을 작곡하고 닫혀있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파트를 나누고 매일 밤낮 함께 합창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에 어느새 외로움의 그림자는 사라진다. 반항아 모항쥬는 천상의 목소리로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교문 밖에서 아빠를 기다리던 페피노의 그리움은 마티유로 인해 점차 사라진다. 그리고 아이들의 하모니가 삭막한 학교에 울려 퍼지면서, 차가웠던 선생들과 교장의 얼굴에도 봄의 미소가 깃든다. 기부금 장학사를 위한 합창공연도 대성공을 이룬다. 비록 그 공적을 교장이 차지하지만 그래도 마티유와 아이들은 노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낀다.
그러나 희망으로 가득차기 시작한 교정은 문제소년 몽당의 전학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그들의 합창은 금지 당하게 되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꼭 봤으면 싶은 영화다. 영화 속에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도 녹아있고, 사람사이의 교감에 관한 성찰도 있다. 인생에 좌절한 사람이 있고, 감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편협한 인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허름한 공간에는 희망은 발디딜 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슴에 사랑을 담고 있던 사람은 알아본다. 작은 씨앗은 발견되고, 좌절한 인생에 쓸쓸하던 사람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나의 초라한 재능이나마 쏱아 붓는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아름다움은 그 자리에서 꽃이 피지 않는 법. 작별의 시간이 오고 슬픔이 앞에 놓인다. 그러나 희망의 대상이 되었던 누군가는 발아하고 있었다. 그때 그 한 작은 아이는 음악가가 되었고 어느 날, 스승이 사망하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화는 그 작은 아이의 기억을 더듬는 과정이었다.

 

<킹콩을 들다> 를 말해야 한다면 비슷하게 밖에 말할 수 없다.

운동선수를 둘러싼 우리 나라 학교 교육과 행정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운동 선수 아이들이 교육에서 배제되며 체벌 속에서 훈련에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해서 거북하였다. 모든 체육교사와 모든 훈련생들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일부이지만, 아직도 운동 선수 아이들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다져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들이 다녔던 고등학교도 체육특기생이라는 아이들이 있었던 인문고교였다. 하지만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반 학생인 우리 아들은 학교에서 해야할 운동을 하지 않았고, 체육특기생들은 일반학생만큼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운동을 한다하면

기록을 내야 하고 기록을 위해서는 일어나서 잘 때까지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하는 학교 운동 선수들은 한가하게 책상에 앉아 공부할 시간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학년이 될수록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훈련을 잘 해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어딘가에서 특기생으로 뽑아줄 대학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몸의 기량을 훈련받아 신기록을 내고 또 올림픽에까지 나갔다 하면 일단은 성공의 길로 들어선 것 같지만, 올림픽을 다시 잘 들여다보면, 금메달 아닌 사람은 이후 연금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훈련 도중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바보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킹콩 선생의 말처럼 운동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 그러나 부상을 당하고 보니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재구성한 것으로 영화 주인공으로 나왔던 교사는 <전병관> 이라는 역도선수를 발굴하기도 했던 고 정인영 선생님이시라 한다.

시골 여중의 가난한 아이들이 선생님과 더불어 역도 선수의 꿈을 키우던 짧은 몇 년의 시간을 들여다 본 것인데, 영화 내내 웃고 울고를 거듭했다. 

영화 말미에 죽기 전 아이들에게 남겼던 글과 아이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 영화와 오버랩되면서 보여졌다. 영화같은 이야기를 살다 간 사람의 추억이 영화의 거름이 되었다.

이 영화는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혼동스러운 어지러운 이 시대에 사람의 사람에게 어떻게 스승이 되는지, 어떤 게 교육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의 편지처럼 보인다

 

아래는 예고편 동영상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LfQ4ddD3zS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