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책 읽어주는 남자-2009년의 책읽기 7

자몽미소 2009. 4. 5. 22:53

 

 

책 중에서 

42쪽-43 쪽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왜 이리 슬픈 걸까? 잃어버린 행복 때문일까? 나는 그 후로 몇 주 동안 행복했다. 그 당시 나는 정말로 멍청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 학년 진급에 성공했으며, 우리는 이 세상에 그 밖의 다른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는 양 사랑 행위에 몰입했다. 그 후로 다가온 것은 진상의 파악, 즉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은 나중에 가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사랄에 대한 깨달음이었던가?

왜일까? 왜 예전엔 아름답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지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동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동안은 행복했는데! 마지막이 고통스러우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 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의식적인 고통이든간에? 그러면 무엇이 의식적인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일까?

 

 

94쪽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나를 따라다니기를 멈추었다. 그녀는 기차가 계쏙해서 앞으로 달리면 뒤쪽에 처지는 도시처럼 뒤에 남았다. 그 도시는 그대로 뒤에 있다.

 

170 쪽

 

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또 그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범죄에 대해 당연히 내려야 할 합당한 유죄 판결을 결코 내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범죄에 합당한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하면, 그녀의 범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와 유죄 판결, 이 두 가지에 대핸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193-194쪽

 나는 당시에 <오디세이>를 다시 읽었다. 나는 <오디세이>를 학교 다닐 때 처음으로 읽었으며 그것을 하나의 귀향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귀향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결코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귀향을 믿겠는가.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것이다. <오딧세이>는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의 이야기이다. 법률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199 쪽

 

나는 한나의 글씨체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쓰느라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또 얼마나 투쟁을 해야 했을지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여겨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랫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 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나는 단 한 번도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일은 계속했다. 일 년 동안 미국에 가 있을 때에도 그곳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보냈다. 휴가 여행을 떠나거나 할 일이 특별히 많을 때에는 다음에 보낼 카세트테이프를 완성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209 쪽

그녀가 글 읽는 법을 배워 내게 편지까지 썼을 때 정말로 감탄했고 또 기뻐했었다. 하지만 나의 감탄과 기쁨은 한나가 글을 읽고 쓰기 위해 바쳐야 했을 그 엄청난 희생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그녀가 글을 읽고 쓰게 된 것을 알고도 그녀에게 답장을 쓰거나 그녀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걸로 보아 나의 감탄과 기쁨은 얼마나 궁색했던가 하는 사실을 느꼈다. 

..

"당신은 재판 과정에서 언급된 사실들에 대해서 재판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내 말뜻은 우리가 함께 있었던 당시에는, 내가 당신한테 책을 읽어주던 그 당시에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느냐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도 마음에 걸리니?" 하지만 그녀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넌 알 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야. 그렇게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하지만 죽은 사람들은 내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어. 그들은 나를 이해하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법정에 있을 수는 없었지.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들은 나를 특히 잘 이해했을 거야. 이곳 교도소에서 그들은 나학 자주 같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일 밤 나를 찾아왔어. 재판을 받기 전에는 나는 그들이 나한테 오려고 하면 쫒아버릴 수 있었어."

 

230쪽

모든 것을 뒤로 하고 10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한나가 죽은 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혹시 내가 그녀를 부인하고 배반한 것은 아닌지, 혹은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 빚을 진 것은 아닌지, 혹시 그녀를 사랑한 까닭에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진작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했어야 했던 것은 아닌지, 그 방법은 어때야 했는지 하는 해묵은 질문들 때문에 괴로워했다. 가끔 나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리고 가끔 그녀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행동에 대해서 화가 났다. 마침내 분노의 물결이 물러가고 그러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때까지. 내가 한 행동과 하지 않은 행동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행동- 그것은 바로 나의 인생이 되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나중에 읽었다.

영화에서는 실제로 목소리가 나왔지만, 영화를 볼 때는 들을 수 없던 소리를 문장을 통해 느꼈다. 그래서 책으로 읽는 이 소설은 가슴에서 잔잔한 울림이 되고 있다. 어제 읽기 시작해서 오늘 책장을 덮으면서 책 속에서 몇 개의 글들을 꺼내 와 적어 두는 것은  이 울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당히 슬프다. 수치심, 책임감,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누군가 누군가에게 남긴 상처에 관한 이야기, 그것을 기억하며 기록하는 남자의 영혼을 들여다 보면서, 이 책은 이러하고 저러하다는 감상을 적지 못하겠다. 몇 개의 단락으로 얼기설기 엮을 수 있다 하여도 그런 감상은 인생이란 미묘한 시간의 색깔과 냄새를 지독히도  단순화 시키는 무례 같아 보인다. 이 책에 관해서는 특히 그런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