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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결혼을 꿈꾸기, 여전히 유효한 전략

자몽미소 2009. 10. 31. 12:20

 

 

 

책을 읽고 내 생각

 

1. 그 남자 이야기

 

 K는 머리 좋고 입담 좋은 50대 중반의 남자다. S대를 나왔고 행정고시를 통해 정치계에 입문했다. 어느 저녁, 나는 그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인맥을 살피다 나와 그의 옛연인이 학교 동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그는 그녀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눈에 확 띄었다. 제주 여자같지 않게  뽀얀 피부에 늘씬한 키, 다른 여자 한 명과 함께 버스에 올라오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눈은 창밖을 보면서도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제주 사람이라는 게 안심되었다. 그녀가 버스를 탄 정류장과 시간을 추리해보니 그녀는 어느 학교의 선생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내일 군대에 가기 위한 신체 검사를 받을 예정이었고, 그 날은 신체검사를 위해 미리 시내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버스에서 내릴 때 그도 함께 내렸다. 그녀가 어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슬쩍 봐 두었다.

뒷날, 그는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오후에 신검이 있었으므로 오전엔  그녀가 졸업한 학교에서 졸업앨범을 찾아냈고, 이름을 알아냈고, 어제 버스 정류장이 있던 학교에 전화를 걸어 그 학교에 근무하는 것까지도 알아냈다. 

그날 오후 그는 신체 검사를 마치고 나서 그녀가 어제 내렸던 정류장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그녀는 어제 그가 버스를 탄 시각에서 한 시간을 더한 시간에 그가 기다리는 정류장에 내렸다. 그는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 서울에 다른 애인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서울 여자 보다는 제주 여자를  장차의 며느리로 선호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이 아름다운  제주 여자와 결혼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부모님에게 알려 드렸을 때, 부모님은 그보다 더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누구네 집 손녀, 누구의 딸이라는 것, 그녀의 부모와 가정환경까지 그녀를 보지도 않고서 부모는 그녀에 대한 것들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몇 년 후 고향에 돌아와 직장엘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찾지는 않았다. 직장의 몇몇 여자들이 그녀에 관한 소식을 알려 주기는 했다. 그녀와 결혼할 마음이 이제는 없어졌으므로 그녀를 만날 생각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안전한 결혼을 꿈꾸었다. 그것은 사실 자기 집안의 문제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부일처제도를 지키지 않은 바람에 어린 시절에 상처 입고 그런 것이 자손들에게 주는 폐해를 몸소 느꼈던 그는 여자 문제가 자기 생을 흔드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첫눈에 반하였던 그녀는 결혼대상자로서 무척이나 불안한 존재였다. 그녀의 가족사항이 그에게는 굉장한 문제였다. 청년을 설레게 하던 그녀의 눈부심은 그녀의 가족관계라는 또다른 벽을 보는 순간 스르르 무너졌던 것이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것을 지금도 다행으로 여긴다. 이후 그와 그녀 관계를 눈치챘던 사람들은 그가 그녀와 결혼하지 않기로 했던 결정을 칭찬해줄 정도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아서 그녀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여성을 둘러싼 가족사가 그녀 본래의 것들을 퇴색할 수 있다는 것을 그와 만나 이야기하면서 확인했다. 

 

내가 읽었던 책, 『오만과 편견 』에서 다아시가 친구 빙리를 위해 해주었던 충고가 그런 것이었다. 또, 그가 엘리자베스를 두고 저울질 할 때도 이와 비슷했다.  200년 전 영국의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결혼을 통해 자신의 기반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많이 가진 쪽이 더 하는 법이다. 가난한 여자는 부자 남자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부자남자는 가난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고,  가난한 남자는 가난한 여자 만나기를 더욱더 원하지 않는다. 결혼의 결합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 끊임없이 계산하는 것, 그래서 결코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고 싶지 않은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라고도 할 수 있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이 경우를 안전에 대한 욕구라 하겠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을 심리학에 대비해 말할 수도 있겠다.  <오만과 편견, 안전해지려는 욕구와 갈망>이라고나 할까.  

 

2. 나도 뭐 다를 게 없어! 

 

 소설 <오만과 편견> 에 나오는 인간군상들은 오만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속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손가락질 할 수가 없다. 자세히 보니 나도 그들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내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건대, 결혼과 이혼의 기반엔 지금보다 나은 환경이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아버지 집보다 나은 즐거운 내집을 원한다거나,  따로 노는 결혼생활 보다는 스스로에 충실할 수 있는 이혼 생활을 하고 싶다거나, 이혼생활을 그만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욕망하는 동안 20 년이 흘렀다. 19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갔던 나, 그래서 결혼 이외에도 충분히 나 개인의 삶을 꿈꿔봐도 좋을 그때에도 나는 내가  만들어 낼 내 인생이라는 것보다는 결혼을 하여 즐거운 우리 집을 만드는 것이 가장 축복된 것인줄로 알고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200년 전의 영국여자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그때 그녀들의 삶의 주제는 훨씬 더 결혼에 집중해 있었고 그것이 당연했다. 하물며, 한정상속이라하여 아버지의 재산이 결코 딸들에게는 나누어질 수 없는데다가, 결혼하지 않고 산다는 일은 누군가에게 평생 얹혀 사는 일일 수밖에 없던 그 시기에, 결혼에 목숨건 여자들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마을에 어떤 남자가 오는지 궁금하고 그 남자의 재산이 궁금하다. 자기 새끼를 먹여살려줄 수컷을 탐색하는 늙은 암사자 처럼 어머니는 생존본능이 강하다. 그리고 그 딸들은  자기 짝을 찾아야 한다는 것 외에 달리 살 길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그런데 이웃에 부자 남자, 잘 생기고 매너좋은 남자가 나타났다.  결혼하고 싶은 시골의 여자는 가슴 설레며 꿈꾸는 게 당연하다. 저 남자가 나에게 반해주었으면..., 하면서 그 남자가 좋아할 몸짓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딸이라도 그러겠고, 내가 엄마라도 그러겠다. 이 소설은 그래서 여자들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자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여자들의 속사정이고, 여성 작가이기에 쓸 수 있는 여자들의 심리보고서다.

 

3. 그후로도 오랫동안?

 

 내게 있어 이 책의 인물 중 가장 큰 재미는 아버지였다. 서재에 있기를 좋아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인물이다. 아내와 딸들이 사리분별을 못할 때 바로 지적할 수 있는 사람도 아버지 뿐이다. 그러나  그의 유한 성격이 가족을 변화 시키거나 특히 딸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켜 주는 등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편으로 보면 무능력한 아버지이다. 그런데 나는 이 아버지에게 내 아버지를 투사하게 된다. 마침내는 우리 아버지도 이런 아버지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재산을 일구고 재산 관리를 잘 하여 노후에도 자식들에게  경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우리 아버지에겐 이 책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위트와 풍자, 자애로움이 모자란다고 느낀다. 그는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우매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버리는 덕이 있어 보인다. 둘째딸 엘리자베스에게 가장 다정한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어떤 문제든 호들갑스럽지 않게 만드는 걸 싫어해 아내와 어린 딸들에 대한 거리두기도 한다.

그는 결혼해 보니 잘못했다고 느꼈으면서도 이 가정을 해체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방에 자기를 유배시켜 스스로 자유롭고자 하였다. 그가 실패한 결혼에서 더 이상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쓴 것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의 서재에서만 그는 그일 수 있었다. 

흔히 결혼은 여자들에게만 더 크고 제약이 심하게 작용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자를 잘못 만나는 남자들의 결혼도 많은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 피로가 조금밖에 거론되지 않았지만, 이 아버지의 아래 세 딸들은 어머니와 더불어 이 남자의 피곤함의 장본인들이다.  마음 맞지 않는 여자와 살면서도 아버지는 사람들에 대한 날선 태도 대신 거리두기로 자기와 가족을 배려한다.

 

소설은 젊은 딸들의 결혼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하지만 뒷배경으로 물러난 이 아버지의 결혼은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소설이 신데렐라의 왕자 만나기형 이야기로서 결혼이라는 골인지점을 향해 모든 에너지가 집중된 느낌이지만, 젊었을 땐 그렇게 읽혔을 이 소설이 나이 먹어 읽으니 보이는 건 이 아버지의 서재이다. 아무리 성공한 결혼처럼 보여도 사실 결혼에 이르는 과정보다는 결혼 후의 시간이 더욱 길고, 그 긴 시간동안 나에게 반한 어떤 남자는 이 소설의 아버지처럼 결혼에서 도망가고 싶어도 못 나가서 겨우 자기 서재로 은신처를 삼는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200년 전 영국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결혼 골인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나 버리는 바람에 <오만과 편견>의 속편이 꾸며지기도 하고 결혼을 꿈꾸는 이들을 위해 영화와 드라마로 다시 만들어지는 등 여전히 인기 있는 이야기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결혼하고, 빙리와 제인이 결혼하면서 주위 사람들까지 모두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는 글쎄 그  유효기간이 얼마 정도였을까, 아무리 첫눈에 반한 사람들이라도 결혼이라는 실제상황에서 연인처럼 살아내기란 말그대로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건 대개의 결혼에서 증명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더욱더 200년 전 영국 이야기를 현대 소설처럼 읽고 그 것에 대한 가지치기와 부풀림을 멈출 수 없는 것일까  

   

4. 제목 변경과 소설의 한계

 

책 뒤의  작가 연보를 보면 제인오스틴은 결혼을 해 보지 못한 채  친척과 친구의 집을 전전하면서 또는 올케들 아이들을 돌봐 주면서 글을 썼다고 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보이는 여자들보다 더 못한 상황에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어쨌든지 노동하는 여자의 고민은 없으며 빙리양처럼 오빠에게 얹혀 살면서도 경제적 곤란 없이 사는 여자들만 나온다. 베넷씨네도 부자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하인을 쓰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파티를 열 수 있는 재정과 거주지가 있다.

<오만과 편견>의 원제목은 <첫인상>이었다.  첫인상에서 파생된 오해가 편견을 불러 일으키고 그것이 자칫 좋은 남자였던 다아시를 놓칠 뻔 했지만 운좋게 다시 그 남자를 만나게 되고 다시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연애담이다. 18 세기 말의 영국 상황은 브르조아계급이 차츰 상승하고 있었을 때이지만, 소설에서는 여전히 그들에 대한 지배계층의 편견이 크고, 그 지배계층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삶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이 <첫인상> 이라는 소설 제목을 그대로 달아주는 게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흔한 연애소설로도 족하게,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로 족하게 그 제목을 달아 두는 게 좋겠다 싶은 것이다. <오만과 편견> 이라는 제목이라면 그 시대에 오만, 지배계급의 오만과 편견을 다루고, 하층 계급의 삶을 보여주어야 그 제목을 달만하지 않은가 싶다. 사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을 달지 않고 원래 그대로의 제목대로라면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명성 만큼, 이 소설이 담아낸 내용은 그저 그런 연애담이고 그 시대에 머물러 있기에 200 년 흘러 세계 명작이라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저 결혼에 관한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 이외엔 아무 것도 보는 게 없다. 그리고 그 이야기라면 이 소설 말고도 너무 흔하고, 또 우리 이미 다 아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작가가 살아가는 세상의 문제엔 눈을 감은 채, 개인의 안정에만 과도한 힘을 쏟은  연애 소설, 결혼 하지 못한 여자의 결혼환상기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소망은 상당히 지나친 면도 있어서 다아시가 엘리자베스를 결혼상대자로 정하는 데 따른 빠른 감정 변화를 독자인 나로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독자가 보기엔 엘리자베스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사랑이라는 감정의 물결에 충분히 적셔졌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거리를 두던 엘리자베스를 향해 돌아선 이후엔 아주 딴 사람처럼 굴었다. 다아시라는 사람은 소설이니까 만들어지는 사람이겠지, 바로 제인오스틴 그녀의 소망이 담겨 있는 남자로 바꾸는데 독자보다 작가가 먼저 앞서 가 버렸다.

 

 

5.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는

 

세계 문학을 읽는 일은 원언어의 한도를 넘을 수 없기에  언제나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번역한 사람의 언어능력을 완전히 믿는다고 전제하고, 내가 읽는 이 한국어가 원어에서도 이런 맛이겠거니 해야 하는 것이다.  

베넷씨의 말, 콜로시의 말을 읽을 땐 고등학교 시간에 영어강독할 때의 수업 시간이 생각났다. 종합영어 독해편의 해석문을 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와 디아시가 나누는 대화에서 나는 하여튼 노력해도 엘리자베스의 언어구사가 총명하다거나 매력을 발산한다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엘리자베스에 대한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아서 다아시가 그녀를 매력있게 보는 일조차 콩깍지 쓴 남자의 상황으로 읽었다. 어떤 문장은 부정의 부정문 같은 것은 서너 번을 되풀이 해 읽어야 했는데, 그런 문장을 우리 국어문장을 바꾸는 건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금기사항일까 싶었다. 한국어를 읽으면서도 영어를 읽는 것 같은 이 기분으로, 세계 문학을 만나야 그 지역 문학에 근접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엘리자베스가 매력있는 여자로 보이고  다아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건 책 보다는 오히려 영화였다. 전에 <오만과 편견>에 관한 영화나 드라마를 본 적은 없다. 호호야님이 제공해준 몇 분 동안의 화면으로 본 것이 전부인데 그걸 보고 나니 주인공으로 설정된 여자와 남자가 다 행복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글로서는 그런 소망이 잘 일어나지 않았었다. 책을 읽으면서는 다이시도 엘리자베스도, 빙리씨는 물론이려니와 제인조차에게도 호감이  가지 않았는데 영화 주인공들을  화면에서 직접 보고 나서는 이 미남미녀들에게 응원을 해 주게 된 건 무슨 연유일까, 내가 읽은 번역문이 문제인지 어쩐지, 영어 원문의 맛을 잘 모르는 나는 또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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