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사카모토류이치/ 2011년의 책읽기

자몽미소 2011. 11. 7. 21:33

 

 

책을 읽고 내 생각 ( 2011년 11월 7일 월요일)

 

<엔진> 이라는 잡지에 인터뷰 연재를 했던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어제는 작가의 자기 연대기 같은 소설을 읽었는데, 오늘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일본 음악가의 인생을 읽었다. 어제 <빵 굽는 타자기>를 읽으면서는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는( 밥을 먹을 수 있고, 또 영혼의 문제도 해결되는) 전업작가에게 글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보았는데, 오늘 이 책에서는 어떤 음악가에게 음악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았다.

사카모토 류이치에게는 음악이라는 것이 이질감 또는 어긋남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토끼를 기르게 하고 나서 토끼에 대해 작곡을 해 보라는 요구를 받았던 때의 회상하면서 그는 아래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토끼라는 동물과 내가 만든 곡은 아무 관계도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 버렸다. 실제로 손가락을 깨물리고 똥을 치워주면서 내가 접했던 토끼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난 것이다....

이건 상당히 근본적인 문제였다.

...

전쟁에서 가족이나 혈육을 잃은 슬픔을, 그 비통함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그건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그 시점부터 음악 세계의 것이 되어 버려서 가족의 죽음 그 자체로부터 멀어진다.

 

분명 글을 쓰는 일도 그럴 것이다. 어떤 일을 글로 써내려가는 시점에 이미 좋은 문장인가, 아름다운 문장인가, 힘 있는 문장인가 하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음악도 마찬가지여서 실제로 겪은 누이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되어 버려서, 두 가지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생긴다.

...

표현이란 결국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추상화, 공동화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개인적인 체험이나 아픔, 기쁨은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결손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한계와 맞바꾸어 완전히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종의 통로가 생긴다. 언어도 음악도 문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책에 소개되는, 그가 작곡했다는 음악의 대부분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책으로 제목만 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가 영화 음악을 작곡했고, 그것도 영화 <마지막 황제>의 음악을 맡아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며 그 후에도 또 다른 영화에서 음악을 맡았고, 또 그가 만드는 음악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니 어쩌면 나는 그 중 몇 노래를 그의 음악인 줄 모르고 흥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소개한 영화와 그가 읽었다는 책과 그가 들어서 감명 깊었던 음악 까지 두루두루 밑줄 긋게 된다. <마지막 황제>영화를 다시 보면서 음악을 다시 들어봐야지 라고 하거나 그가 2007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는 일본동요와 창가 모음집 <일본 노래>도 구입해서 들어보려고 한다.

 

책 뒤에 그가 더욱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작업의 세계에서 이루어낸 업적을 이야기 할 때는 음악 쪽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좀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느껴지긴 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그저 돈을 벌어서 살아야 하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음악 노동자를 했다는 청춘 시기의 이야기는 매우 재밌었다.

그는 어린 날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사람도 아니었고, 공부도 그럭저럭 했으며 여기 저기 가고 싶은 데 가서 놀기도 많이 놀고, 고등학생 때의 데모조차도 뭔가 멋있어 보이려고 했다고 한다.

이 책이 소설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일생을 인터뷰 한 것이니 그런 글 속에서  한 사람의 솔직함을 보게 되어 인생 이야기를 읽는 일이 즐거웠다. 지금은 아주 훌륭한 재능의 소유자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는 식의 고백이니 읽는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어 하고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서 이후에도 그의 이야기를 쭉 따라 듣게 하는 것이다. 아주 어린 나이때부터 싹수가 보였다는 식의 위인전이나 천재 예술가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틀이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식상해진 지 오래니까.

 

또한,  음악으로 자기만의 색깔을 잡은 이 답게  사유의 깊이가 돋보였는데 그이의 생각들을  문장으로 만날 때는 마치 그의 음악을 다 듣지 않았어도 듣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