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딸을 위한 그림책 읽기-히메유리

자몽미소 2016. 1. 2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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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히메유리

 글: 히메유리평화기념관

그림 미타 **

오키나와 현 이토만시에 있는 히메유리평화기념관.

이곳은 오래 전에 히메유리학원에 다니던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키나와 전투를 알려드리기 위해 만든 자료관입니다.

 

 

<히메유리학원>은 13세부터 19세까지의 여자애들이 다니던 학교였습니다.

오키나와현 마와시촌, 현재 나하시 모노레일 아사토 역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소시쥬 나무가 늘어선 반대편에 붉은 지붕의 학교숙사가 이어지고, 체육관과 수영장도 있던 아주 멋진 학교였습니다. 

 

이 히메유리 학원에서 우리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운동회, 발표회를 하고 소풍도 갔습니다.

운동회 때는 달리기며 댄스, 발표회 때는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규칙이 많아서 엄하긴 하였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는 학교생활은 아주 재밌었습니다.

 

우리들이 히메유리 학원에 다니고 있던 즈음에, 일본은 중국과 미국 등의 나라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우리들의 생활은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학교 교복도 멋진 세라복이 아니라 몸빼 형태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공부를 하는 대신에 전쟁을 위해서 군기지를 만드는 일을 돕거나 훈련을 받았습니다.

 

폭탄이 떨어져 화재가 났을 때를 대비하여 소방훈련을 한다든가. 몇 십킬로미터의 길을 온종일 걸으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전쟁 같은 건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오키나와가 전쟁터가 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4년 10월에 미군의 비행기가 날아와서 오키나와에 폭탄을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수많은 집이 불에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다음 해 1월에는 히메유리 학원의 일부도 폭탄에 부서졌습니다.

전쟁은 차츰차츰 격해지면서 우리들 여학생도 일본군의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3월 23일 밤, 교장선생님께서는 " 나라를 위해서 힘껏 노력하세요" 라고 말씀하셔서, 우리들 222명의 학생과 18명의 교사들은 하에바루 촌에 있는 오키나와 육군 병원으로 함께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밤새 걸어서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병원은 고가네 숲이라는 언덕에 굴을 파서 만들어진 곳이었습니다.

낮인데도 병원 안은 깜깜하고 눅눅했고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자 부상당한 병사들이 점점 더 많이 실려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쉴 틈이라고는 없이 병사들을 돌봤습니다. 먹을 것이나 물을 날라다 주기도 하고 똥오줌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수술을 돕기도 하였습니다. 불을 켠 양초를 들고 있든가, 아파서 날뛰는 병사를 꽉 누르는 역할을 했습니다.

치료가 늦어져서 상처구멍으로 구덩이가 끓은 병사들은 " 붕대를 갈아 줘!", "구더기 꺼내 줘!" 라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우리들은 비위가 상한 것을 참아가면서 그 구더기를 집어냈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차츰차츰 죽어갔습니다. "물을 줘-!" " 어머니!" 라는 말을 남긴 채.

 

 

동굴 병원 안에는 물이 없어서 물을 길러 가는 것도 우리들의 일이었습니다. 밥은 동굴에서 떨어진 취사장까지 가지러 가야 했습니다. 밖에는 폭탄이 엄청나게 날아와서, 펑 펑 하며 폭발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쉴 장소마저 없었습니다. 밥도 겨우겨우 먹을 뿐이었습니다. 폭탄이 떨어져서, 친구들이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힘들었지만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야. 우리들도 힘낼게" 라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점점 심해지고, 일본군은 점점 쫒겨갔습니다. 우리들이 있던 동굴 병원에도 미군이 들이닥쳤습니다.

 

6월 18일 밤. 병원장이

"병원은 오늘로 해산이다" 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솔 교사는 " 안전한 곳을 찾아서 혼자서라도 오래 살아줘"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동굴 밖은 폭탄이 폭풍처럼 날리고 있는데 우리들끼리 어떻게 어디로 가면 좋은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까 " 날이 밝으면 더 위험하다. 빨리 나가" 하며 고함을 쳤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들은 폭탄이 날아오지 않는 때를 보고 있다가 차례대로 동굴에서 나갔습니다. 밖으로 나가서는 모두들 갈팡질팡하며 도망다녔습니다. 폭탄을 맞고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우리들도 폭탄을 피해가면서 달아났습니다.

아침이 되자 비행기와 군함에서 더 많은 폭탄이 날아왔습니다.

전차도 쫒아왔습니다. 우리들은 바위 틈이나 아단 나무숲속에 몸을 숨겨가면서 도망다녔습니다.

 

숨어 있던 때, 가까이에 폭탄이 떨어져서 친구들이 크게 다쳤습니다. 움직일 수 없게 된 친구들은

"우리는 괜찮으니까, 얼른 도망가 !" 라고 했습니다. 도망가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되니 우리들은 친구들을 남기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쫓기고 쫓기며 바닷가에 가까이에 갔더니 수많은 미군 군함이 보였습니다. 이미 육지에도 바다에도 도망갈 장소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바다에 들어갔다가 절벽을 올라가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6월 20일, 밤이 되어 공격이 멈추자 고요한 바다 위를 달이 떠서 밝게 비추었습니다. 돌연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고향" 노래를 부르자 모두 함께 울면서 노래했습니다.

한 친구가 "한 번만이라도, 폭탄이 날아다니지 않는 하늘 아래서 마음껏 걷고 싶어!" 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해안에 있던 우리들은 마침내 미군에게 바싹 몰리게 되었습니다. 바위 틈에 숨어 있던 친구 몇인가가 미군에게 붙잡히는 게 무서워서, 수류탄을 터뜨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망치던 중에 대부분의 친구들과 선생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았던 우리들은 결국은 미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습니다.

 

 

오키나와전은 일본군 병사, 미군 병사만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에서부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가들까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우리들은 정말로 우연히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 남게 되었지만,

죽어간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평화가 있다는 것인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것을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다며, 죽어간 친구들이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책의 일부만 사진을 올려 두었습니다

2016년 1월 27일 수요일, 김미정 번역.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의 관장님께서 선물로  주신 책을 번역해 보았다.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책이라서 상당히 축약하여 이야기 하였지만, 이 책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어른들인 우리들도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 때  전쟁에 휘말린 소녀들은 이 학교의 학생들만이 아니다. 오키나와의 다른 여학교, 남학교들도 전쟁에 동원되었고 죽어갔다. 오키나와 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황민화 교육 아래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일본이 전쟁에 이길 것이라고 믿었고, 전쟁준비에 동원되었다가 미국의 공격에 죽어갔다. 물론,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모든 나라들에서 국민총동원령은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시민들까지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위안부와 노동자의 강제연행은  일본이 실시했던 국민총동원령의 산물이다.

 

이 책에 그려진 상황은 전쟁 당시의 수많은 일들 중에 극히 일부분이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의 모습을 축약적으로 보여준다. 학생들을 전쟁에 내몰아 놓고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각자 알아서 하라는 명령은, 우리나라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미군의 부조리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군이 일으키고 있는 중동에서의 자원 전쟁은 결국, 상대하는 나라의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게 만들고 있으니까.

 

딸아이가 오키나와에 오기로 하였었지만  남편이 바쁘다 보니 우리와는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었고, 대신 2월 중순에 친구들과 짧은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딸아이의 이번 여행은 관광지로서의 오키나와만을 보게 될 것이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이니 이번의 여행이 찍은 그 한발짝이 이후 오키나와를 더 알고 싶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 번역은 순전히, 내 딸 아이를 위해서 해 본 것이지만 누군가 이 불완전한 번역을 읽고 오키나와의 전쟁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될 것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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