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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양군도 (後) -조성윤-

자몽미소 2016. 2. 4. 13:01



1914년 10월 일본 해군은 독일령이었던 미크로네시아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였는데 독일수비대의 저항은 없었다.

완전 무혈점령으로 미크로네시아를 집어 삼킨 것이다.

그로부터 남양군도는 일본 해군사령관에게 전권이 주어진 군정(軍政) 치하로 들어갔다. 


넓은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 그곳에서 식민지로서의 가치를 찾기보다 어쩌면 일본인들의 남진(南進)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무형적 의의가 더 컸을런지도 몰랐다.

당시 일본은 팽창주의 로망주의 이상주의 열광적 애국주의의, 욱일승천의 기운에 충만하여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후반부터 일본인 이주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남양흥발, 남흥수산, 남양석유등 일본 민간 자본의 진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사이판에는 카토리 신사가 남아있고, 시내 한복판 슈가킹공원에는 남양군도의 개척영웅이라느 남양흥발주식회사의 사장 마쓰에 하루지의 동상이 드높이 서있다>

그로부터 일본은 내각총리대신의 지휘감독하에 남양청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역시 선주(先住)한 유럽인과 다를바 없었다.

원주민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족속으로 여기고, 일본 통치에 순복하도록 길들여 노동력 확보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

일본어를 공통언어로 하여 도덕역사에 중점을 두고 국기게양이나 궁성예배 의식제례등을 교육하였지만 일본인 학교와 원주민 학교는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원주민들을 본토에 견학시켜 일본의 근대적 모습을 과시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 통치자에 대한 감사등 천황 중심국가에 대한 인식을 주입시키려는 노력도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일본 불교의 포교소를 설치하는등 종교적으로도 동화정책을 펼쳤지만 스페인과 독일의 통치를 거치면서 가톨릭과 기독교로 개종한 주민들의 의식을 돌려 놓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불어 남양군도에서도 어김없이 1923년부터 1937년까지 식민지 척식사업(拓殖事業)을 위한 토지 정리사업이 진행되었다.  <동척(東洋拓殖株式會社)의 토지정리사업 시행시기.. 오키나와 1899-1903, 대만 1899-1924, 조선 1910-1918, 관동주 1914-1924, 사할린 1922- 1923>


또다시 일본제국의 해군이 남양군도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시기가 도래하였다.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슬슬 일본 해군은 태평양 패권정책을 추진하는 미국을 강하게 견제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미 필리핀과 괌을 자신의 영토로 삼고, 하와이 미드웨이 그리고 괌에서 필리핀을 잇는 태평양 중앙선, 알래스카와 알류산 열도를 잇는 태평양 북방선, 하와이 피닉스 사모아 뉴기니를 연결하는 태평양 남방선에 각각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의 팽창주의 역시 태평양을 무대로 영역을 넓히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로부터 일본 해군은 군비확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여 항만시설과 해군기지 건설 비행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결국 1933년, 일본의 만주국 침공으로 국제연맹과 미국등이 일본을 비난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하고, 1935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1939년에 일본 해군은 남양군도 방위를 위한 제4함대를 창설한다.

일본이 결정적으로 전쟁을 결심한 정확한 시점은 언제였을까.

1941년 12월 8일, 기어코 일본은 칼을 뽑았다.

그 날 일본군은 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기습 공격하였던 것이다.

실로 벼락같은 작전이었다.

같은 시각에 또다른 함정들은 조용히 괌을 공격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괌을 점령하였다.

같은 날 일본 육군은 동남아시아를 기습하였다.

12월 8일에는 북부 말레이 반도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였고, 12월 18일에는 홍콩을 점령하였다.

연이어 1942년 일본 육군은 싱가포르를 점령하였고 필리핀과 네덜랜드령인 수마트라 보르네오를 점령하여 고무와 석유자원을 확보하였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1년도 아니되어 전세는 차츰 뒤집혀 지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화로 미군은 1943년 5월부터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선 것이다.

급기야 남양군도는 일본대본영의 최전방 방어선이 되었다.  


1944년 6월 11일 미군기가 사이판 전역에 공습을 시작하여 남양군도는 포화에 휩쌓였다.

6월 13일 함포사격이 개시되고 6월 15일 미 해병대의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6월 19일 일본군과 미군의 기동함대가 맞붙은 대규모 해전인 마리아나 해전이 벌어져, 여기서 일본 해군은 궤멸되었다.

6월 24일 일본군 대본영은 사이판 포기를 결정한다.

미군의 사이판 상륙작전이 개시된지 열흘만이었다. <남양군도의 사이판 이외 다른 섬, 즉 괌이나 로타나 티니안의 전황에 대한 것은 생략>


아, 남양군도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군 주력부대 대부분은 붕괴되었고, 섬 전체의 60%는 미군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대본영의 사이판 포기 결정을 일본군 3만여명과 원주민 5천명 민간인 2만여명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구원부대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포탄을 피해 숨어들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민간인들은 일본군이 후퇴하는 방향을 따라 같이 움직였다. 


군인들은 반자이 돌격으로 속속 죽어나가고, 7월 9일 산 꼭대기에는 대부분 노약자들과 부녀자들인 1만여명의 민간인들이 몰려 있었다.

미군은 민간인임을 알고 함선에서 고성능 스피커로 투항을 권고하였지만, 그들은 자식을 목졸라 죽이고 혹은 가족들이 함께 손잡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대일본제국의 황민화 교육이 그들을 절벽 아래로 내다 던졌던 것이다.

포로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라는, 천황폐하의 옥음(玉音)이 그들을 벼랑 끝에서 등을 떠 민 것이다.


아, 그곳이 반자이 클리프, 바로 만세 절벽이다. 

사이판과 티니안의 유명한 투어코스가 되어 관광객을 부르고 있는 그곳이.


남양군도는 이제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사이판은 1944년 7월 9일, 티니안은 7워 30일, 괌은 1944년 초에, 팔라우는 12월에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

미군은 남양군도에서의 전투 종료를 선언하고, 1945년부터는 일본본토를 향해서 유황도(이오지마)와 오키나와로 전선을 이동시켰던 것이다.


포로가 된 일본군은 분류를 거친 다음 대부분 하와이 수용소로 보내어졌고, 민간인은 각 지역마다 수용소를 설치해 수용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후, 민간인들은 본국으로 귀환시켰다. 

민간인들의 출신은 다음과 같다.

사이판 : 일본인 1만 3954명, 조선인 1411명, 차모르인 2966명, 캐롤라인인 1035명

티니안 : 일본인 1만3천명, 조선인 2700명. 

<다른 섬은 생략, 귀환자 총수는 약 6만명인데 그중 일본 본토로 귀환한 사람은 2만 41명뿐이고 나머지 4만 1487명중 조선인 7726명, 대만인 550명, 중화민국인 136명, 오키나와인 3만 3075명으로 남양군도의 일본인들은 대부분 오키나와 사람들이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점령한 남양군도 티니안섬의 하고이 비행장에서 B-29 를 발진시킨다.

그 날 히로시마의 하늘에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솟았다.

사흘후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전쟁이 완전 종료될 때까지 남양군도의 비극, 집단자살은 연이어 벌어졌다.

오키나와에서 필리핀에서 만주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의 비극.

지금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는 저자의 아내가 면담과 관련 책들의 번역을  통하여 포스팅하고 있는 당시 남양군도와 오키나와에서의 슬픈 이야기들... 친구공개 포스팅이라 권할수 없어 아쉽지만 언젠가 그 내용이 조교수의 책으로 나올 것이다. 


명치유신의 주역들이 만든 일본이라는 국가는 민주국가가 아니라 입헌군주국이었다.

천황이 정점에 서 있고 제국의 백성은 천황에게 복종하는 신민이어야 했다

황민화 교육은 철저하게 명령에 복종하고 따르는 국민을 만들자는 것이다.

천황의 이름으로 배포한 교육칙어는 반복된 세뇌로 국민들에게 내면화 되었다.

그러다가 전쟁때는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항복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명예롭게 자결하는 것이 옳다는 신념으로 기꺼이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려하면 자식은 저항하지 않고 죽는다.


이 책에서도 분명하게 말한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기쁘게 바다로 투신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황민화 교육의 결과였다고.

반자이클리프에서 투신은 국민에게 국가가 명령한 억지죽음이었다고.

집단자결이 아니라 집단강제사였다고.


저자가 천착하는 바 초점은 여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학자의 어조는 시종 냉정하였지만, 집단자살의 현장을 상상하는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남양군도에 진출하면서 일본은 '남양의 섬들은 일본의 생명선' 이라고 선전하였다.

들은 풍월인데 나치의 핵심에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라는 사상이 있다고 한다.

독일어로 ‘생활권’ 이라는 말이지만, 이를테면 이런 뜻으로 쓰여진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공하는 목적이 "열등인종을 쓸어내고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리움을 확보한다"는 의미로.

일본제국주의의 안중에도 남양군도의 주인인 차모르 족에 대한 배려같은건 눈꼽만치도 없었을게다.

오로지 일본인의 레벤스리움의 확보를 위하여 남양군도를 점령하고 남양군도를 경영하였던 것이다.  


일본 대신 남양군도를 차지하고 앉은 미국.

그들은 정의인가, 정당한가.

민족자결의 원칙, 군사적 이용의 신탁통치 금지라는 원칙은 어디로 갔는가.

중국의 부상으로 더욱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된 미군의 군사기지 괌과 오키나와.  

그곳 역시 미국의 레벤스리움를 확보한 것일 뿐이다.


슬픈 섬 남양군도.

수천년 그 곳에 터잡아 살아 왔던 주인들은 정작 어디 있는가.

멀고 먼 그곳으로 가 살고 죽고 태어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미는 어디 있는가.


제주와 오키나와 그리고 남양군도. 

너희는 누구냐? 저자는 섬에게 묻고 있다.

말하자면 저자의 연구는 그 대답을 찾아 섬의 속살을 더듬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


학자의 몫은 그러하되 내 강렬한 관심은 반자이 클리프에 머문다.ㅎ

이 책을 덮고 나는 모리 오가이의 소설 '아베일족'을 찾아 다시 읽었다.

황민화 교육이 곧이곧대로 심화되고 체화되는 일본인의 독특한 의식구조를 한번 더 들려다 보려고...


'남양군도'는 수많은 도큐멘트와 기존의 연구물들과 당시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현장답사와 면담을 거처서 남양군도'에 관한 지식들이 정연하게 정리된 노작이었다.

나로서는 모두 전혀 새롭게 알게 된 내용들, 미크로네시아에 관심있는 자 이 책에서 얻을지어다. ㅎㅎ


힘에 부처 그만 쓴다.



출처 : 동 우
글쓴이 : 동우 원글보기
메모 : 책부족 동우님이 심혈을 기울여 써 주신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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