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日本語の勉強屋

14명의 진실- 번역(1)직격 폭탄에 잃어버린 왼팔과 청춘

자몽미소 2016. 10. 14. 16:30

17-37 쪽


직격 폭탄에 잃어버린 왼팔과 청춘

토코모토 후미코 씨.

1924년 8월에 태어나 오키나와 전 당시, 농협에서 근무했다. 아버지는 방위대로 소집되고, 어머니와 함께 이토만에서 지내고 있었다. <산부대>의 본부 동굴에 연행되어 물긷기와 밥짓기를 해야했다. 남은 가족은 일본 병사에게 동굴을 빼앗겼는데 나중에 가족이 모두 죽고 여동생만 살아남았다. 친구 4명과 동굴 속에 숨어 있었지만 포탄이 명중해서 왼쪽 팔을 크게 다치게 되었고 나중에는 절단을 해야 했다. 친구들은 모두 죽었다. 전후, 여동생과 재회해서 배급소에서 일을 얻어 연명하였다. 현재 92세, 이토만 시 **에 살고 있다.



증언

<고생을 함께 하던 친구들을 격려해가면서 피범벅이 되어 도망다녔다>


- 저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 오키나와 전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 해 주세요" 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낸 후에는 이 삼일 가슴이 아프고, 일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키나와 전에서 왼팔을 잃었습니다. 그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전쟁만큼 멍청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에서는 그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참을 수 없다는 기분이 됩니다.

그래서, 조금씩이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전쟁체험을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토만은 사탕수수재배를 많이 했던 지역이어서 드넓은 사탕수수 밭이 펼쳐지고 가까이에서는 제당공장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이었던 저는 농협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쇼와 19년 경( 1944년 경), 오키나와에 관동군인 <무부대>가 들어와서 진지구축과 비행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남자들은 비행장 만드는 데 징용되어 집에 오지 못하고 거기서 일을 했습니다.

우리들처럼 25세 이하의 미혼 여성들도 오로쿠 비행장 숙사에서 숙식하면서 일주일 정도 일했습니다, 우리들은,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킨 다음에 나오는 돌멩이를 자루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운반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학생들도 동원되어 삽을 들고 마을을 밀어 급히 비행장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