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日本語の勉強屋

엄마와 함께, 둘만의 여행/옮겨적기와 번역(6)

자몽미소 2016. 9. 19. 16:20

母との二人旅


 母と、旅をした.行き先は、カンボジアとベトナム.四泊六日の女二人旅.思えば母と二人きりで旅行をするのは初めだ。

 母は、世界有産に凝っていて、アンコールワットを観てみたいという。いちおう旅にまつわる仕事をしているので,私が行程表を作った。まずは成田からべとなむのホーチミンに飛ぶ、乗り継いでカンボジアのシェムリアップへ。そこで二泊してアンコールワットを堪能。ホーチミンに戻って、のんびりショッピング。

 アンコールワットは,今からおよそ九百年前に建てられたクメール建築の集大成。ヒンドウ教の神、ヴィシュヌに捧げられた寺院だ。

その広さ,東京ドーム十五個分。幅二百メートルにも及ぶ堀に四方を囲まれている。

灰色の石の塔が、シンメトリに並んでいる。濃い禄の中になじんでいるその姿は、寺院というより静謐な古代都市を思わせる。

 暑かった.気温は四十度を越えていた。体中から汗が噴出す.母は日傘を持ちながら、それでもデジカメで撮り続けた。

<来て見なきゃ、分からないね><見てみなきゃ、何もいえないね>

 日頃、何事にも冷静な母が、興奮して連呼する。

 あるテレビ番組で聞いた、コメンテーターの言葉を思い出した。

 旅行の最大の利点歯、ああ、行ってよかった、という記憶である。

 この暑さ。ねっとりした湿度。深い緑の匂い。お堀の上を渡ってくる風。お線香の香り。広い空。道行く人の笑顔。そのどれもがリアルに刻まれていく。

 かなりの距離を、母は歩いた。私のほうが先に音をあげた。

 <お母さん、少し休もうよ> 

 <ここは、二万五千人の人が、三千年あまり掛けて作ったんだって。もったいなくて、やすめないよ>

 のちに起こる悲劇も知らずに、母はがんがん歩き続ける。

 日傘の上で陽の光が耀いていた。

 カンボジアのシェムリアップ。その埃だらけの田舎道を歩いていたら、ふと、幼い頃の記憶がよみがってきた。

 あれは小学二年生の夏.私は、夏の間だけ、母の実家にあずけられた。

 父が無言で田舎道を歩く。私は、父の足元から舞い上がる砂埃を見ながら、必死について歩く。

 母が体を壊し、弟の面倒をみるのが精一杯だった。父はこれから長期の主張に出なくてはならない。長女である私は、祖母の元に送られる事になった。親元を離れるのは初めてだった。

 奈良と三重の県境.陽は早く落ち、心細さはつのる。聞きなれない方言に身を硬くした。もしかしたら、自分は二度と両親のもとに帰る事ができないのではないか。そんな不安がヒグラシの声とともにグルグル回る。特に夜が怖かった。ほーほーという鳥の声が、不吉な伝言を届けにきたようで、眠れない。私は、父が迎えに来てくれるのを、毎日毎日、待っていた。


 異国の地カンボジアで、あの夏を思い出すとは思わなかった。

 私とは母、灼熱のシェムリアップから、喧騒のホーチミンに向かった。飛行機の窓から、夕闇に包まれた田舎道が見えた。

 どこでも続く真っ直ぐな赤い道。



 ホーチミンのバイクの数には驚いた。 

 その無造作に鳴らされるクラクションの音は、驚いて木から逃げるセミの羽音に似ていた。

 ホーチミンに着いた翌朝、それはやってきた。

 激しい腹痛。トイレに駆け込む。<あれ?なんか変なもの、だべたかなあ?>まず、思う。

 <加奈子ちゃん、情けないなあ。日頃の鍛錬が足りないからそういうことになるのよ>とクールに言っていた母も、<あ、屋、やばい。私も。。。来た>とトイレに直行。

 ついには二人とも、ベッドから動けなくなった。体を丸めていないと、痛くて耐えられない。

 <加奈子ちゃん、どうしよう。無理して歩きすぎたね>と母は、情けない声を出す。

 私は受話器を取り、ホテルのコンシェルジュに、この非常事態を訴える。幸運なことに日本人スタッフがいた。その人、平さんは、私たちを近くの病院に連れて行ってくれた。

 その病院は、小児専門らしく、デイズニーのキャラクタが天井かぶら下がっていた。

 背が低く、丸々太ったお医者さんに、病状を訊かれた。平さんが通訳してくれる。私と母はベッドに並んで横になった。

 <これから、点滅をするそうです> 平さんが言った。

 <私は、ホーチミンに来て、まだ一年ですが、この点滅で治らなかった腹痛はありません。大丈夫。きっとよくなりますから>

 平さんを見送ると、急に眠気がやってきた。

 気がつくと、夜だった。私と母のベッドの間には薄いピンク色のカーテンがひかれている。

 <お母さん?>と呼んでみる.<ん?>とくぐもったような声。

 <生きてる?><運、生きてる>二人で小さく笑った。

 痛みは消えていた.一難去った安堵感からか、私たちは、話始めた。平さんの笑顔、この街の印象。そして訪れたカンボジアの感想。

 <お母さん、私ね、カンボジアで思い出したんだ>と私は祖母の家で過ごした夏の話をした。

 <寂しかったよ。すごく>そんなふうに正直に言えたことに驚いた。すると、母はこんな話をしてくれた。

 <お父さんがね、一度だけ、加奈子の様子を見にいったのよ。あんまり心配でね。仕事の合間を縫って、元気にしているかどうか見にいったんだって。加奈子はね、井戸から水を汲んで、それを大きなタライにいれていたそうよ。そんなに水をいれたら持ってないよ。ああ、転ぶ。はらはらしながらずっと見ていたんだって。なんで声をかけなかったかっていうとね、ここで声をかけたら、かえって加奈子につらい思いをさせる。結局、連れて帰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お父さん、一生懸命、我慢したんだって>

 大きなクヌギのきの陰から私を見守る父の姿を、想像した。

 <お父さんの話するの、久しぶりだね>と私は言った。

 ドナルドダックが描かれた天井を見ながら、やっぱり旅はいいなあと、思った。

                                                                                                    

옮겨적기: 2016년 9월 9일

 번역-2016년 9월 19일 월요일(新垣華江)


엄마와 둘 만의 여행.


엄마와 여행을 했다. 여행지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4박 6일 동안 여자 두 사람의 여행.

생각해 보면 엄마와 둘이서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는 세계유산에 혹해 있어서 앙코르와트를 보고 싶다 했다.  어떻든 여행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여행표를 만들었다. 우선은 하네다에서 베트남 호치민으로 갔다가 이어서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날아간다. 거기서 1 박을 하고 앙코르와트를 즐긴다. 호치민으로 돌아와서는 느긋하게 쇼핑하기.

앙코르와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에 지어진 크메르 건축의 집대성된 곳이다. 힌두교의 신인 비슈느에게 바쳐진 사원이다.  넓이는 동경 돔 15개를 합쳐놓은 정도이고, 폭은 200미터 정도의 도랑이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다. 회색의 돌탑이 좌우대칭으로 세워져있다. 짙은 녹음 속에 녹아든 그 모습은 사원이라기보다 정밀한 교대도시처럼 보인다.


더웠다. 기온이 40도를 넘었다. 땀이 쏟아진다.

어머니는 양산을 들었으면서도 카메를 들고 연신 찍어댄다.

" 오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야" " 보지 않았으면, 아무 말도 못할 거야"

평소에 무슨 일에든 차분한 엄마가 들뜬 목소리로 끊임없이 환호한다.

어느 방송에서 들었던 뉴스해설가의 말이 떠올랐다.

여행의 최고의 이득은, 아 정말, 가보니 좋았어 라고 하는 기억이라고.

그 더위, 끈적끈적한 습도, 짙은 녹음의 냄새, 도랑 위를 넘어오는 바람, 향 냄새, 너른 하늘, 오고가는 사람들의 미소.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새겨진다.

엄마는 꽤 먼 거리를 걸었다. 내가 먼저 앓는 소리를 했다.

"엄마, 좀 쉬자니까요."

"여기는, 이만 오천 명의 사람이 30년이나 걸려서 지었다고 해. 미안해서  쉴 수가 없지"

뒤에 일어날 불상사도 모른 채 엄마는 또박또박 걸어갔다.


캄보디아의 씨엠립의 먼지 투성이 시골길을 걷고 있자니,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소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나는 여름 동안만 외가에 맡겨졌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시골길을 걷고 있었고, 나는 아버지 뒤를 흩날리는 흙먼지를 보면서, 힘껏 따라가고 있었다.

엄마는 몸이 아파서 동생 하나 돌보는 것도 벅찬 상태였다. 아버지는 곧 장기출장을 가야만 했다. 장녀인 나를 할머니댁에 보내게 되었다.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라 현과 미에 현의 경계인 그곳은 해가 빨리 져서 불안하고 쓸쓸했다.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없어 위축되었다. 가끔 다시는 부모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이 저녁매미소리와 함께 맴맴 맴돌았다. 특히 밤이 무서웠다. 호- 호- 하는 새 소리가 불길한 소식을 전하러 온 것 같아 잠들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데리러 오는 걸, 날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국의 땅 캄보디아에서 그 여름의 기억이 떠오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와 엄마는 작렬하는 씨엠립을 떠나 소란스런 호치민으로 갔다. 비행기 창에서 저녁 어스름에 감싸인 시골길이 보였다. 어디까지라도 이어질 곧게 뻗은 붉은 길이.


  호치민의 오토바이의 수에 놀랐다. 아무렇게나 울려대는 크랙션 소리는 놀라서 나무에서 날아가는 매미의 소리와 비슷했다. 호치민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드디어 그 일이 일어났다.

격심한 복통, 화장실로 달려가면서 " 아, 뭔가 상한 거라도 먹은 건가?" 우선, 생각해본다.

"카나짱, 엄살하지 마라, 평소에 단련해두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라며 비웃듯이 말하던 엄마도 " 아, 아이고, 지독해, 나도..., 그러네" 라며 화장실로 직행한다.

드디어 두 사람 모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몸을 웅크리고 있지 않으면 너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 카나짱, 어떻게 하지? 너무 무리해서 걸었나봐!" 라며 엄마가 가여운 소리를 한다.

나는 호텔 접객담당에게 전화를 걸어 이 비상상태를 호소했다. 운 좋게도 일본인 스탭이 있었다. 그 사람, 타이라 씨가 우리를 근처 병원에 데려다 주었다.

그 병원은 소아전문답게, 디즈니의 캐릭터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키가 작고 통통한 의사가 몸 상태를 물어왔다. 타이라 씨가 통역을 해 주었다.

나와 엄마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이제부터 링겔을 맞을 거에요" 타이라 씨가 말했다.

"저는 호치민에 온 지 1년이 채 안 되었지만요, 이 링겔 맞고도 복통이 안 낫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괜찮아요. 꼭 나을 거니까요."

타이라 씨가 돌아가고 나자 졸음이 몰려왔다.

깨어 보니 밤이 되었다. 나와 엄마의 침대 사이에는 핑크색의 얇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엄마!?" 하고 불러보았다.

"으응!" 우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있어?"

" 응, 살았네!"

둘이서 작게 웃었다.

복통이 사라졌다.  한 고비를 넘긴 안도감에 엄마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이라 씨의 미소짓는 얼굴, 이 거리의 인상, 그리고 방문했던 캄보디아의 감상 등등.

"엄마, 나 말야, 캄보디아에서 생각이 났었다!"  나는 할머니 집에서 지냈던 여름을 이야기했다.

"쓸쓸했었어. 아주 많이" 그렇게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자 엄마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버지가 말야, 한번은 카나코를 보러 갔었단다. 너무 걱정이 되었으니까. 일하던 중간에 기회를 봐가지고, 건강하게 지내는지 어떤지 보러 갔었대. 카나코는 말야,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그걸 큰 대야에 넣고 있더래. 그렇게 물을 담으면 들지 못해. 어어, 넘어질라, 조마조마해가면서 쭉 보고 있었대. 왜 부르지 않았냐고 하니까 말야, 거기서 불러 버리면, 오히려 카나코가 더 힘들어할 것 같더래. 결국, 데려오지 못할 거니까, 아버지가 무진장 참았다고 하더라."

커다른 상수리 나무 그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버지 이야기 하는 거, 오랜만이네" 라고 내가 말했다.

도날드 덕이 그려진 천장을 보면서, 역시 여행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