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日本語の勉強屋

아버지의 전후와 나/ 아라가키 선생님의 에세이

자몽미소 2017. 6. 9. 15:38

 

나는 한때, 내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개명을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하곤 했다. 우리집은 4남 7녀로 형제자매가 11명이었다. 남자들은 제쳐두고라도, 여자들의 이름은 츠끼코(月子),호시코(星子), 아끼코(明子),세이코(正子),야스코(安子),카네미(金美),게이코(京子)였다. 내 이름은 야스코, 언니와 여동생과 비교하면 꿈도 없어 보이고 어쩐지 싸게 보였다.

내 이름에 아버지의 특별한 바람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다. 이전에도 듣기는 했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나는 패전 다음 해에, 필리핀에 살던 우리가족이 일본으로 이송된 바로 직후, 아버지의 고향인 안자(安座) 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필리핀에 이민을 갔던 것은 1917년, 열아홉 살 때였다. 어업에 종사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때, 아버지는 필리핀 네그로스 섬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이었다. 부모님은 큰딸과 둘째딸이 태어난 후에는 파나이 섬의 이로이로 시로 이주했다. 그곳에는 오키나와 사람을 중심으로 한 어업협동조합이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는 것처럼 보였던 파나이 섬에 불운이 닥쳤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미 1945년 3월,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인들은 산 속으로 쫒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도피 중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죽었다. 자결을 한 사람도 있다. 영양실조로 죽는 아기도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 부모님과 5명의 자식들은 모두 무사했다( 큰언니는 학교 때문에 오키나와에 미리 와 있었다)

일본인 강제송환이 시작되지 어머니도 고국인 필리핀을 떠나기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왔다.  우라가(浦賀) 항에서 즈시(逗子) 수용소를 거쳐, 구마모토, 미야자키를 전전하던 끝에, 아버지 고향에 돌아온 것은 1946년이었다.


" 그 전쟁에서 빠져나와 가까스로 고향 안자(오키나와 지명 安座)에 돌아왔어. 이제부터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했지. 그 바람을 담아서 네 이름을 야스코(安子) 라고 지었단다"

전후, 아버지의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내 출생이었던 것일까.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아라가키 야스코:

1946년 출생, 오키나와 대학 졸업, 오키나와 지역사 협의회 회원. 오키나와 우라소에시 역사편집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