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흑산-2011년 책읽기

자몽미소 2011. 12. 30. 19:37

 

 

책을 읽고 내 생각.

 

김훈의 소설을 읽고 나면 늘, 이야기보다 그의 문장 속에서 허우적댄 느낌이다.

<흑산>을 읽었으니  정약전과 황사영과 박차돌을 구별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나 작가가 연필을 눌러쓰며 꺼내온 사람들은 매번 작가의 깊은 고독을 닮아버린 듯하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여럿의 인물이 결국 한사람으로 회귀하여, 인간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막막하다. 그렇게 또 김훈의 이전 소설과 오늘 내가 읽은 소설은 같았다.

 

문장엔 살 냄새가 진동한다. 매에 꺽이고 찢어지며 타 들어간 살내는 구역질이 났다. 여자 몸의 비릿함은 낯설고, 욕망을 어쩌지 못하는 남자의 들척지근함은 울렁증이 일었다. 그러다  다시 작가의 문장 덕분에  살아올라오는 순결한 영혼에 위안을 얻다보면, 인간에 대한 체념도 한숨처럼 엮여져 소설을 덮으며 사람으로 사는 것이 서글퍼졌다.

 

한 달 전에 가톨릭 서점에 갔더니 서점 주인이 이 책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교보문고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했다. 김 훈이 지금은 성당에 다니지 않지만 30 년 전에 영세를 받았다는 말도 했다. 140여 년 전 조선 백성 사이로 스며들던 가톨릭, 그 사상을 이해하였던 이나 모르던 이나 겪어야 했던 조선 후기 종교 수난사에 대한 소설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읽어보니 가톨릭의 수난사라기 보다는 어떤 믿음들의 수난처럼 보였다. 가톨릭의 포교를 극력하게 저지하였던 대비로서는 나라의 존망을 어지럽히는 야소(예수)무리를 처단해야 한다는 믿음이 굳건했고, 신자들로서도 원래 있어야 할 것이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믿음이 단단했다. 이들에게 하느님은 사랑과 존중이 없는 이 세상을 구원할 존재였으니 널리 알려야 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정치와 권력은 인간이 모두 함께 드높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야소의 무리를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악함으로 간주했다. 악은 처단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악을 가려내기 위해 무수한 악을 저질렀다.  천주교를 악으로 세우면 스스로는 선과 도덕이 되었으나 그들의 방법은 특히 더 고약하고 비열했다.

 

 

그렇게 정약종은 죽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를 갔으며 황사영은 숨었다.소설에서는 정약전이 지나던 유배길과 유배지에서의 일상이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데  정약전은 머물던 섬을 흑산이라 하지 않고 자산(玆山) 이라고 하고, 섬의 물고기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책의 이름은 <자산어보>이다.

소설가 한창훈은 정약전이 남긴 글이 반가워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라는 부제를 달고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책을 냈다. 김 훈은 정약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서를 많이 읽었으나 소설에는 옮기지 못하였다고 책 말미에 적어 두었다. 한창훈의 글을 읽을 때는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조선후기 실학자의 귀중한 연구성과로 읽혀 흐믓하기까지 하다가, 김 훈의 글로 정약전을 대하니 사람 사는 일의 서글픔이 끝간 데 없이 길고 긴 바닷속 물길 같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섬처럼 외로워 물고기의 뼈와 비늘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나는 소설이 남긴 서늘함 탓인양 저녁의 고요에 묻혀 오래 전의 그 검은 바다를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