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2024년 日記帳

글잉걸 5- 냄새가 있는 선물

자몽미소 2024. 4. 1. 16:00

Morning Letter Greengirl 5-냄새가 있는 선물

 

아들의 머리가 아기 침대에 누워 있던 손자를 덮고 있다. 기저귀에 파란 줄이 보이면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고, 똥을 쌌을 때는 냄새로 알 수 있다며 코를 대고 확인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난 지 보름째, 아들 내외는 아기 똥에서는 요구르트 냄새가 난다고 했다. 샛노란 색일까 했는데 기저귀 안에는 여름 풀처럼 싱싱하고 푸르지만 묽은 상태의 똥이 한 숟갈 정도 양으로 기저귀를 묻히고 있었다. 나도 머리를 기울여 아기가 내놓은 똥에 코를 대본다. 나에게는 다른 냄새가 났다. 맡으면서 이걸 뭐에 비교할 수 있나 떠올려 보았지만 비슷한 무슨 냄새도 생각나지 않고 뭐라고 할 수 없이 달콤하고 즐거워진 느낌만 남았다. 이런 냄새를 싫어할 수 있을까.

똥을 잘 싸고 있는 아기는 대견할 뿐이고, 매일 자는 모습만 보다가 아기가 기저귀 갈아달라고 울기라도 하면 그게 반가워서 아기를 눕혀 기저귀를 갈아보는 것이다. 아기 몸을 더 많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운이 좋은 순간이다. 조금 전 엄마 젖을 먹고 뽕뽕해진 배, 아직 덜 아문 배꼽, 다리를 들어 올릴 때면 가느다란 발목이 부러질 것 같아 조심하는 내 손은 혹시 똥이 묻었을지 모르니 엉덩이 위로 작은 등까지 닦아내면서, 이 상황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걸 우는 걸로 표현하는 아기를 달랜다. 금방 끝나,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언제까지 손자의 똥에서 행복한 냄새를 느낄까. 내 자식의 기저귀를 갈며 냄새가 싫다 느껴보지 않았으니 손자에게서도 그러하겠지. 내 아기의 똥, 내 손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싫지 않게 느끼는 건, 인류 모두가 갖게 된 동물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의 냄새는 좋고, 냄새가 좋으니 더 좋아지게 하는 연쇄작용, 서로를 가까이 당겨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되도록 하는 화학반응.

 

손자의 똥 냄새를 맡다가 나는 숨을 꾹 참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도랑에 발을 담그고 있다. 도랑에 허리를 굽히고 선 나는 기저귀를 흔들고 있다. 기저귀 천에서 똥이 떨어지도록 물 속에서 흔드는 동안 나는 숨을 참는다.

밭 주위를 돌담이 둘러싸고 있고, 밭과 길 사이로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부모님이 몇 년간 토마토 농사를 짓던 밭 주위로는 제주도에서는 드물게 논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벼’ 라는 말을 배우기 전에 나는 ‘나락’이라는 말을 그 논에서 배웠다. 그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1960년대에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아니면 저수지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밭을 논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저수지는 수산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수산저수지’라고 했다. 저수지와 우리 밭 사이에는 한길이라고 불리는 자동차 도로가 있었다. 시내에서 우리 마을을 거치는 자동차나 그 반대로 달리는 차 뒤로는 뿌연 흙먼지가 같이 달렸다. 그 길은 우리 밭보다 위쪽에 있었고 가끔은 자동차가 달리는 길이었으므로 나는 보기만 할 뿐 그 길로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콜타르’ 라는 까만 액체로 도로를 포장하기 전까지 나는 밭보다 높은 곳에 있던 그 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먼지를 보았고, 그 길 너머에 소나무로 가득한 얕은 산을 보았다. 그것은 한라산과 달리 산이라는 이름 대신 봉을 붙여, ‘수산봉’이란 이름의 오름이었다. 수산봉 옆에 수산 저수지가 있었고, 내가 서 있는 도랑의 물은 그 저수지에서 흘러서 아래쪽으로, 논이 있는 모감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여름에 우리 식구는 수산봉이 바로 앞에 보이는 모감마을에 밭 하나를 빌려 그곳으로 이사해서 한여름을 보냈다. 부모님은 그때 토마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비닐 하우스 농사가 성행하기 훨씬 전이라 봄에 심은 토마토는 여름에 한창 수확기를 맞았다. 밭 어귀에는 아버지가 소나무 기둥을 세우고 평상도 해 넣었으며 유리창 대신 비닐로 창문도 만들어 여닫을 수 있게 한 오두막이 있었다. 집과 밭 사이가 조금 멀다는 것 때문에 우리 식구는 토마토를 수확하는 동안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에게는 아마도 ‘시간이 금이다’ 라는 감각이 강했으므로 그런 결정을 하게 했을 것이다. 밭과 그 오두막 사이는 어른 걸음으로 20여 분 남짓의 거리였지만, 집에 어린 자식들과 세 끼 먹이를 줘야 하는 돼지가 있고, 밭에는 아침저녁으로 익어버리는 토마토가 있는 상황에서 따는 즉시 마차에 토마토를 싣고 시내로 나가 팔아야 했으니까, 아버지로서는 밭에 오두막을 지어 오고 가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오두막 안에는 다섯 식구가 몸을 누일 만큼의 나무 평상이 있었고 사방으로 모기장을 쳐 두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평상 아래는 원래 밭이었으니까 흙바닥이었고 한켠에 석유곤로를 놓고 부엌으로 쓰고 있었다. 오두막의 반대편에는 돼지우리도 만들어 돼지도 함께 밭에서 살고 있었다. 여름 동안 우리 집을 비워두고 돼지와 우리 식구는 수산봉 앞 밭에서 오두막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시기 두 해를 그렇게 했다.

나는 그때 석유곤로에서 밥을 하지는 못했지만 동생들의 옷이나 기저귀 정도의 작은 빨래는 할 수 있었다. 작은동생은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오줌을 싼 기저귀는 빨기 쉬웠지만 똥을 싼 기저귀는 빠는 요령이 필요했다. 우선 도랑에서 흐르는 물에 기저귀를 담고 똥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도록 흔든다. 덩어리 똥은 빨리 떨어지지만 묽은 똥은 기저귀 천 사이사이에 염색한 것처럼 색이 들어서 도랑에서 흔들어 빤 것으로는 깨끗해지지 않는다. 오줌을 눈 기저귀는 도랑물로 헹구어서 밭 돌담에 걸쳐 말리고, 똥색이 안 빠진 기저귀는 ‘모감물’ 이라는 빨래터로 빨러 갔다. 모감물은 마을에 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모감마을 사람들이 주로 쓰는 생활용수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서 산물이라고 했는데 식수로 쓰는 물은 50미터 정도 위쪽에 좀 더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채소를 씻고 빨래는 하는 곳은 따로 30평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 마을 사라들이 공동으로 사용했다. 나는 그곳에서 세수를 하기도 하고 다리에 낀 때도 밀었다. 채소를 씻는 칸, 빨래를 하는 칸이 위아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빨래하는 칸에는 편편한 돌들이 몇 개 놓여서 빨래판 역할을 했다.

나는 빨래를 할 준비로 대야에 기저귀와 동생 옷과 비누를 담고 오두막을 나선다. 밭에서 빨래터로 가는 길은 어린 나에게는 그리 짧지만은 않은 길이어서 나는 대야를 왼쪽 허리에 얹고 가다가 오른쪽 허리에도 번갈아 가면서 고무신을 신은 발로 그곳으로 간다. 비누는 감저 비누라고 까맣고 네모난 것이다. 고구마 전분을 빼다 남은 무엇으로 만든 거라고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무얼 어떻게 해서 만들었던 건지 알 수 없다. 어른들이 쓰는 흰색 빨래 비누보다 값이 싼 비누였는데 거품도 잘 안 나서 빨래가 잘 안 되는 비누였다. 빨래 요령이 없는 내가 비비고 방망이로 두들기는 대신 자꾸 비누만 쳐대며 낭비한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흰색 비누를 못 쓰게 했기 때문에 값이 싼 감저비누는 내 비누인 셈이었다. 나는 빨래하는 요령이 없다기보다는 아직 어린애였기 때문에 비비고 두들길 손힘이 없어서 기저귀에 비누를 칠하는 것처럼 여러번 묻혀서 기저귀를 빤다. 거품이 안 나니까 또 비누를 바르고 조물거려 본다. 빨래터의 흐르는 물에 헹구고 다시 봐도 여전히 노란 똥색이 지워지지 않았으므로 여러번 까만 감저 비누를 기저귀에 묻힌다. 나는 그저 비누를 여러 번 칠했으니 세탁이 된 것이려니 하고 빨래를 짠다. 하지만 작은 내 손은 젖은 빨래를 꼭 짜지 못하므로 물에 적셔진 기저귀는 올 때보다 무거워져 버렸다. 나는 옆구리에 대야를 번갈아 걸쳐가며 우리 밭 오두막으로 향한다.

밭 어귀에서 작은동생의 머리가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 머리카락이 새로 잘 나오라고 밀어버린 아기의 머리가 여름 햇살에 익어간다. 나는 동생을 업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빨리 걸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젖은 빨래가 무거워 빨리 가지 못한다. 작은동생은 밭의 흙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큰동생은 토마토 밭 고랑 사이를 걸어 다닌다. 밭 안쪽 돼지우리에서 웩웩거리며 뒹구는 돼지들처럼 내 동생들도 흙에서 뒹군다. 나는 기저귀를 햇빛에 데워진 돌담 위에 걸치고, 아기를 돌보는 누나가 되어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도랑에서 물을 떠다 동생의 몸을 닦는다.

 

토마토철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동생들은 흙마당 위에서 논다. 어머니는 두 남동생들에게 아버지가 만든 똥꼬 바지를 입혔다. 아무 데나 똥을 싸도 되도록 바지 가랑이를 가위로 잘라 버린 것이다. 걷기 시작하여도 기저귀는 채워야 할 시기였지만, 농사일에 바쁜 부모님은 아기들의 배변 때마다 옆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기저귀를 뗀 큰남동생도 똥이 마려우면 마당에 앉아서 똥을 누었다.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고 그 돼지가 사람똥을 먹었던 1970년대의 제주도였던 것이다. 동생들은 돼지 우리에 가서 똥을 눕기엔 아직 어린 아이이고 아기였다. 동생들은 집안에서 놀다가도 똥이 마려우면 마당에 가서 앉았고 똥을 누고 일어났다.

그 똥을 치우는 건 내가 할 일이었다. 동생이 똥을 싸면 나는 엉덩이를 들게 해서 똥구멍을 닦아주고 나서 마당 한 켠에 쌓아놓은 보리짚을 빼 왔다. 그것을 반으로 꺽어 뜰채처럼 만들고 똥을 건지듯이 마당에서 뜨고는 돼지우리인 통시까지 가져가 버린다. 돼지가 그것을 먹는다. 개를 키울 때는 동생이 똥을 누는 즉시 개가 핥아먹었다. 겨울이 되어 요강에 똥오줌을 눌 때도 있었지만, 동생의 똥꼬 바지는 더 이상 옷에 똥을 싸지 않을 만큼 클 때까지 입혔고 겨울에도 입혔다.

똥꼬 바지만 입혀 차가웠던 동생의 엉덩이가 생각난다. 작은동생이 낮잠에서 깨자 나는 동생을 업고 외할머니 집으로 갔다. 같은 동네에 살던 할머니들은 동생을 봐 주러 집에 오기도 했고, 내가 업고 할머니에게 가면 봐주기도 해서 내게는 구원자 같았다. 하지만 전적으로 손자를 맡아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동생 보기가 버거우면 할머니 집으로 업고 갔고 그날도 작은동생을 업고 외할머니집으로 향했다. 추운 날이었다. 동생을 업고 집 밖으로 나오자 똥꼬바지만 입은 동생이 추울 것 같아 동생의 엉덩이를 받힌 깍지낀 손에 힘을 주었다. 무거웠지만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에 초겨울 싸락눈이 내리자 바람은 더 차가워졌다.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바다쪽으로 곧바로 내려가야 하는 길이라 불어오는 바람에 숨쉬기마저 힘들어서 가까스로 외할머니에 도착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멀리 갔는지 나무 대문마저 잠겨 있었다. 나는 외할머니 집 앞에서 피난길에 홀로 남겨진 아이처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동생의 몸은 무거웠고, 내 팔은 아프고 저려 왔다. 지나가던 동네 사람이 나를 보고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 외할머니 집에 왔는데 할머니가 없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목이 메었다. 슬픈 일이 아닌데도 눈물이 나려 했다. 동생의 엉덩이가 차가워서 내려놓을 수도 없고, 몹시 지쳐서 그랬을 것이다. 내가 여덟 살이나 아홉 살의 어느 즈음, 작은남동생이 아직은 밑이 터진 바지를 입어야 했던 똥싸개 아기였을 때의 일이었다.

 

동생의 똥을 치워야 했을 때,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 하기 싫다고 말해 본 적도 없었다. 나 아니면,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평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놀면서 나에게 일을 시킨 게 아니었다. 나는 다만 보이니까 알아서 그 일을 하였다. 그래도 동생이 빨리 커서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부모님이 밭에서 돌아오기 전에 동생들이 잠이라도 자 버리면, 밥도 안 먹이고 재웠다고 야단을 맞는 나로서는, 동생들이 내 말을 잘 들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두 남동생은 내가 챙겨주기도 전에 피곤에 지쳐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날 부모님에게 동생을 잘 못 봤다고 야단을 맞았고, 그러면 내가 먹을 것을 차려주고 있는데도 그 새를 못 참고 일찍 잠들어 버린 동생이 미워졌다.

 

내 손자의 똥을 보면서, 나는 50년도 더 된 똥 생각이 났다. 이즈음의 아이들과 달리 밭에서든 집에서든 육아라기보다 가축처럼 키워지던 동생들이 가엾어진다. 그리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던 어린 나도 사실, 참 대견했구나 한다. 그래서 오늘에서야 나는 아홉 살의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준다. 내 손자의 볼과 머리를 만지는 손으로 어린 나의 가슴도 조용히 쓰다듬어 본다. 손자의 몸에서처럼 나의 몸에서 따뜻한 냄새가 난다. 60세의 내 몸에도 아직은 싫지 않은 냄새가 있다.

 

(202441일 낮, 김미정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