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2024년 日記帳

글잉걸3-손자를 만난 날, 할머니를 읽다

자몽미소 2024. 3. 29. 10:44

 

 

Morning Letter Greengirl 3-손자를 만난 날, 할머니를 읽다

 

산후조리원에서 돌아온 손자를 만나러 갔다. 태어난 날 병원에서부터 조리원에 가서도 아들은 매일 아기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과 영상으로 손자를 보며 매일매일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가까이 찍은 사진에서는 살이 통통히 올라 있고 표정도 다양해져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거구나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아기는 정말 작았다. 너무 작아서 얼른 만질 수가 없었다. 만나자마자 내가 할머니야! 라며 눈물을 흘릴 것 같았지만,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만 가득 올라왔다.

작은 몸에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는 것도 신기했다. 내 주먹보다도 작은 얼굴에 이마와 눈썹, 눈과 코, 입술, 볼, 머리카락과 귀가 다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피부처럼 얇았지만 모양 곱게 자라나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닿을 때는 날카로운 손발톱면이 느껴졌다. 나도 이런 작은 아기를 낳은 적이 있었나. 내 아들보다 300그램이 더 무겁게 나온 손자가 이렇게 작은데, 분명 내가 낳은 아기도 이런 때가 있었던 거다. 이 무렵의 아들의 모습은 어땠지? 그때 사진을 찍지 못했고 조금 더 자란 다음의 사진도 갖고 있지 못하다. 태어난 다음 아들의 얼굴 생김새가 어땠는지 알려면 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새삼 당황했다. 내 기억에는 아이를 낳던 때의 상황만 남아있고, 아들의 얼굴은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아기를 안고 남편이 내 뒤에서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을 아들이 찍어준 사진으로 보았다. 아들이 보내온 사진을 다시 여동생에게 보냈더니 행복한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이라며 기뻐했다. 내 아기를 안고 찍은 사진은 남아있지 않지만, 손자를 처음 안아보는 순간은 기억만이 아니라 사진으로도 남아있게 되었다.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손자에게 이 사진이 알려줄 것이다. 기계적으로 삭제만 하지 않는다면, 기계 고장으로 꺼내 보지 못하는 사고만 없다면.

 

손자를 안은 오늘의 이 모습을 손자와 함께 볼 날이 올까.

알 수 없는 그 시간을 생각하다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지만 나로선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을 본다. 내 할머니가 나를 안아보았을 때.

 

할머니는 처음 나를 안고 내 손과 손가락을 살폈다고 했다. 내 손이 손가락과 손톱도 길쭉한 아버지의 손을 닮았기에, 내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그러니까 내 할머니는 내가 내 아버지의 자식인지 아닌지 어머니를 의심했던 거라고,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랬다. 손자를 처음 보고 손가락을 살피던 할머니의 마음이 아버지가 말한 그대로인지 아버지의 억측인지, 할머니에게 물어보지 않은 한 모르는 일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들려준 할머니와 나의 첫 장면에는 다소, 할머니를 비난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들어있다. ‘너의 할머니가 결혼을 반대했었다. 결혼 전 임신이라 낙태를 종용했었다. 아기를 낳고 며칠 후에 어머니를 일하러 나가게 했다, 등등’ 아버지의 스토리에는 할머니가 몹시 인정 없고 사나운 시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버지는 시어머니에게서 괄시를 받는 자기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어머니와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증조할아버지의 집에서 지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물려받은 초가집에서 결혼 전에는 동생과 함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결혼 후 곧 분가를 하기로 작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내 어머니를 내 할머니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 아버지는 지금껏 주장한다. 자기는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는 카테고리에 넣어져 되풀이 이야기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아버지의 분가 결심으로 할머니는 작은아버지와 살게 되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살게 되었다. 단지 분가의 형태가 아버지가 어머니와 그 집에서 나온 게 아니라, 자기 동생과 어머니를 그 집에서 나가라고 한 것이다. 아버지가 종손이어서 그 집은 자기 집이고, 그러니 당신들은 이 집에서 나가시오!의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 살아생전에 왜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거냐고 할머니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내가 보기에 할머니는 어머니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을 때마다 나에게 이야기 하였다. 아버지가 화를 내기 시작하면 아버지 바지를 붙잡고 싸우지 말라고 울어라, 아버지 그만 하라고 빌어라, 어머니를 때리지 말라고 외쳐라. 그러나 나는 결코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때리는 것을 봐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기도 전에 얼어버렸다.

나의 어린 시절의 일에 관해서는 할머니에게서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서너 살 무렵이던 어느 날, 내 뺨이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때린 것이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따져 물었다고 했다. 왜 어린 애를 ! 그때 할머니는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후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말도 더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하는데 당신이 뭐냐?”

라고 했다고, 그 시간을 복기할 때의 할머니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그 말을 할머니와 오일장에 다녀오던 길에 들었다. 할머니는, 육이오 때 헤어진 할아버지와 살던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본에서 목수일을 하였다는 것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화가 난 일이 있으면 서로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이야기를 하여서 부부싸움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너의 아버지의 성격이 점점 포악해지고 있어서 누구를 닮아 저런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구덕을 지고 걷고 있었고 나는 할머니 옆에서 걸었다. 가끔씩 차가 다니는 길에서 할머니에게는 내가 보호자인 것 같은 열 살 무렵의 일이었다. 할머니가 아픈 이야기를 한다고 느낀 나는 차마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할머니의 얼굴을 살펴보지 못했다. 젊은 아들이 무서워져 버린 할머니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도 이미 아버지가 무서워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이야기도 그날 할머니에게서 들었다. 내가 아주 작았고 몸이 크지 않고 있어서 할머니는 나에게 줄 음식으로 병아리 한 마리를 잡아 고아 먹였다고 했다. 그 고기를 먹고 난 후에는 얼굴에 살이 올라 동그래지고 키도 커졌다고.

나는 할머니가 먹여주던 닭고기의 맛도 아버지가 내 뺨에 올린 손바닥의 아픔도 기억하지 못한다. 서너살 무렵의 다른 일이 기억나는 것도 있지만, 닭고기와 푸른 멍은 기억에 없다. 그러나 할머니와 아버지가 지내는 모습을 봐 오면서 할머니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것을 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도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의 아버지 무서워서 너희 집에 못 들어간다. 너 올 때나 가지!”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오랫동안 남의 집살이를 하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10년 전쯤에 아버지 집 마당 한쪽에 무허가 슬레이트로 지은 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아버지가 할머니 집을 지어 준 것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할머니에게서 나는 집을 지을 때 너의 아버지에게 돈을 다 줘 버려서 모아놓은 돈이 없다는 말도 들었던지라 아버지 말은 믿을 수 없다. 할머니의 집이 지어져서 마당을 나눠 쓰는 모자지간이 되었지만 아버지와 할머니가 밥을 같이 먹는 일은 없었다. 따로따로 경제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 할머니는 나이가 들었어도 혼자서 밥을 해 드셨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할머니와 같이 밥을 먹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결혼을 한 후여서 친정에 갈 때는 반찬거리를 사 가서 밥을 했고 식사 자리에 할머니를 오시라 불렀다. 할머니는 내가 갔을 때나 제삿날 외에는 한마당에 사는 아들네 집으로 오지 못했다. 아버지가 농사일을 도와 달라고 할머니에게 부탁하는 일은 있었겠지만, 할머니가 당신의 아들네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은 손녀인 내가 갔을 때나 제삿날에나 함께 하는 일일 뿐이었다. 내 할머니는 돌아가시고도 아들에게서 밥을 얻어 먹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 아버지는 생모에게서는 재산을 받지 못했고, 자손을 낳지 못하고 죽은 큰아버지의 아들로 친척들간에 인정이 되어서, 그러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당신의 부모이며 그들의 재산(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초가집 같은 것)을 받았기에 제사도 그들의 것만 한다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할머니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서 냉대를 받는 어머니가 되어 버렸다.

 

내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51년 전인 1913년에 태어났다. 내가 10살이던 1973년에 환갑을 맞이했다. 그 후 23년을 더 살고 세상을 떠났다. 내 기억에 있는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게는 늘 할머니의 모습으로만 있던 늙은 사람의 얼굴 뿐이다.

1973년 봄에 결혼식을 올린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결혼식 사진에 할머니가 있다. 그해 환갑이었던, 지금의 내 나이인 할머니가 한복을 입고 사진 안에 있다. 돌아가시기 두 해 전에 어린 내 아들과 집마당에서 찍은 사진에도 할머니가 있지만 그 20여 년 사이에 할머니 모습은 매우 달라져 있다. 내 기억으로는 늘 같은 할머니 모습이었지만 환갑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의 할머니 보다 젊은 사람이었다.

 

나는 내 할머니가 나를 안고 손가락을 만져보는 것처럼, 내 손주의 손가락을 만져 보고, 잘못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아 가느다란 몸을 만져본다. 할머니도 손가락이 길었다. 평생 노동을 한 손가락 마디에 주름이 많았지만 할머니의 긴 손가락은 나에게 왔다. 할머니가 나를 안고 본 것은 내 손에 이어진 당신 자신이었을 것이다. 60년이 지나 지금은 이곳에 없는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던 마음을 읽는다.

 

(2024년 3월 29일, 금요일 오전 9시 50분, 김미정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