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2024년 日記帳

글잉걸4- 이어 나가는 마음

자몽미소 2024. 3. 30. 10:15

Morning Letter Greengirl 4- 이어 나가는 마음
 
여동생이 아기를 보러 왔다. 구토 방지 쿠션 안에 뉘여진 아기의 몸 위로 나와 동생의 머리가 우산처럼 덮인다. 고개를 든 동생의 눈이 붉어 있었다.
 
동생이 열아홉이 되던 해에 나는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때도 동생은 아기를 보러 학교가 파하자 병원으로 왔다. 눈 한 쪽만 떴다 감았다 하는 조카를 본 여학생은 왜 이러는 거냐고, 아기 눈이 왜 이런 거냐고 말해서, 어머니에게 등을 한 대 세게 맞았다. 아기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 거라고, 아기가 예쁘다는 말도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삼신 할망이 듣고 말과 반대로 해 버린다고.
동생은 조카를 다시 사랑하기 시작했다. 다시, 라고 말하는 것은 동생이 이전에 사랑했던 조카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딸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스무살 여름끝에 가출을 했던 나는 미혼모가 되어 집에 왔고, 당연히 나는 동네에서 혀를 끌끌 차며 이야기하게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집에 온 아기가 너무 예뻐서 친구들에게 아기를 자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아기를 보여 주었다. 태어나서 3개월에 외가에 왔다가 아빠와 함께 친가로 갔던 28개월까지 내 딸은 이모와 이모의 친구들과 마당에서 놀았다. 25년 만에 딸을 만났을 때, 딸은 어린 자기가 담벼락 옆에서 오래오래 기다리던 큰 언니가 기억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게 기억인지 꿈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딸은 엄마인 나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모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와 놀아줄 언니를 담벼락 그늘 아래서 기다리던 일은 어린 아기에게 지루하고 긴 시간이었겠으나 내 딸의 가슴 안에는  그리움의 마음이 조그만 새싹으로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새엄마의 차가운 눈빛에 살이 베인 날이면 딸은 오래전 꿈을 다시 보곤 했다. 자기만 보면 웃어주는 언니, 자기가 제일 예쁜 아기라고 쓰다듬은 여자가 이모인 줄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꿈을 기억하고 나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해 주었을 것처럼 토닥이며 혼자 눈물을 닦았다.
동생은 내 아기를 봐 주고 나는 농사에 바쁜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했다. 농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집에서 살며 아버지의 비닐하우스 일을 배우는 남자들이 네다섯 명의 식사 준비도 내 몫이었으므로, 내가 부엌에 있는 동안 동생이 아기를 업고 놀아주었다. 돈을 벌어보려고 직장을 찾아 나가 내가 집에 없을 때도 동생이 내 딸을 봐 주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벌지 못하였고 딸과 헤어지게 되었으므로 동생은 자기 아기 같던 조카를 잃었다. 언니가 아플까 자기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여고 시절을 보냈다. 가끔은 머리 한쪽이 깨질 듯 아팠지만 조카와 헤어진 후에 생긴 일이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소녀의 머리가 자꾸 아프다는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병원에 한 번 가보지 못한 채 동생의 편두통은 만성질환이 되어 버렸다.
 
동생에게 내 아들은 그저 귀여운 조카 이상이었다. 나는 일을 한다고, 또는 공부를 한다고 아이를 동생에게 자주 맡겼다. 동생이 결혼을 하고 나서 내가 사는 동네에 집을 얻었으므로 내 아들은 이모네 집과 내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자랐다. 아들에게 이모네 집은 편안한 외가였다. 명랑한 이모 옆에서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아들의 아빠와 이혼을 한 이후 나는 사는 일에 더 긴장했고 조급해져서 아이에게는 엄격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들과 둘이 사는 동안, 내 아들에게 이모가 없었다면 아마도 아들은 정신과 마음으로부터 상당한 상처를 껴안고 컸을 것이다. 지금은 아들이 웃으면서 그 시절의 엄마에 대해 말하지만, 그 시절 30대의 나를 떠올려 보면 겉은 젊은 몸으로 멀쩡하지만 내면은 썪고 황폐한 상태여서 어떻게 그런 엄마를 견뎠을까 목소리 맑았던 어린 아들이 가여워진다.
아이를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엄마였으므로 그때의 내 아들은 나와 사느라 고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나는 아들이 내 인생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시키는 데 돈을 썼고, 내 의욕만큼 공부를 따라가지 않으면 아들을 엄청나게 혼내곤 했다. 미친년처럼 구는 엄마를 피해 아들은 엄마에게서 도망쳐 위안처였던 이모네 집으로 가곤 했다.
 
동생은 조카가 아기를 낳고 좋은 아빠가 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다. 다정한 남편이 되고자 하는 조카를 흐믓하게 바라본다. 나와 여동생의 아이들에게는 만나게 해주지 못한 아빠의 모습, 우리들이 바라던 가장의 모습을 내 아들에게서 보고 고마워한다. 그래그래, 그렇게 해야 해. 아내에게 잘하고, 아이들에게 잘 해야 돼.
아들의 집을 나서며 동생은 선물을 못 사왔다고 두툼한 봉투를 건넨다. 조카에게 할 수 있는 한 많이 자기 것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은 동생이 열세 살 소녀였던 때로부터 50이 넘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동생 안의 무엇이 이토록 오래도록 관계를 이어가게 하는 것일까. 내 딸에 이어 내 아들에 이어 내 손자에게까지 이어지는 붉은 마음은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왈칵  쏟아낼 것 같은 저 눈물 속에 담고 있었던 것일까. 언니와 동생으로 만난 지 51년, 몸의 주름살이 늘어가는 만큼 세월 속에 함께 한 이야기들도 쌓여서 내 삶에 묻어있는 기쁨과 슬픔은 물론, 서글픔과 회한도 내 것만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돌보아야 하는 또다른 모습의 자신을 동생에게서 보기도 하는 것이다.
 
(2024년 3월 30일 오전 9시 57분, 김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