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2024년 日記帳

글잉걸 6-기저귀의 추억

자몽미소 2024. 4. 5. 16:39

기저귀의 추억
 
“언니 어린 시절이 이랬다고? 언니가 아니고 할머니가 겪은 옛날이야기 같아!”
밭 도랑에서 기저귀를 빨았다는 내 글을 읽은 막내 동생이 말했다.
이제 오십 초반의 동생에게, 글에 나오는 나는 60세의 언니가 아니고 여덟 살의 아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동생은 내 부모가 눈치껏 알아서 집안일을 하는 딸에게 너무 무심했던 거라고, 결론지었다.
“언니와 나랑 아홉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어린 시절 기억은 너무 다른 것 같아!”
어딘가 미안한 마음으로 동생이 말했다.
“기저귀 말인데, 우리집에서 제대로 된 기저귀를 한 건 너 부터였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기저귀 없이 아기를 어떻게 키우냐고, 동생이 말했다.
 
남동생 둘 아래로 여동생이 태어난 건 내가 열 살이던 1973년 여름이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2년 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제일 큰 밭을 사서 동네 사람을 놀라게 한 젊은 농부였다. 아버지 옆에서 소처럼 일하던 어머니도 그즈음에는 돈에 다소 여유가 있었던 걸까. 하루는 어머니가 사과를 먹고 싶다며 내게 돈을 쥐어주고 한길에 있는 상점에 가서 청사과를 사오라고 하였다. 여름철에 제주도 시골 상점에 와 있던 사과라면 크기 전에 솎아낸 풋사과였을 것이고, 신맛 강한 그게 임산부였던 어머니에게는 먹고 싶은 음식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배는 여름 무렵엔  점점 커지더니 어느 날 저녁엔 두루마리 천을 갖고 와서는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흰 면천을 양팔 길이로 재어 자른 후 올이 풀리지 않게 양옆 가장자리를 공구르기 바느질법으로 꿰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하는 바느질 방법은 이후 내가 기저귀를 만들 때도 그대로 따라 했다.
어머니는 그날 전에 쓰던 동생들의 기저귀가 사실은 밀가루 부대라고 했다. 나는 물었다. 나도 그걸로 기저귀를 했던 거냐고.
“기저귀는 무슨!”
내 질문이, 나도 기저귀가 있어야 한다는 무례한 요구라도 되는 듯, 어머니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나를 낳긴 했지만 기저귀 만들 천이 없었고 집에 있는 낡은 옷을 잘라서 그럭저럭 기저귀를 대신했다고 했다. 나라는 아기가 그럭저럭 키워지던 사이에 옆 마을 일주도로 변에서는 고모가 빵 가게를 시작하였다. 고모가 밀가루를 담았던 광목 자루를 가져와 기저귀로 쓰라고 한 것은 나보다 3살 아래인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였다. 뻣뻣한 광목을 여러 번 삶아 방망이로 두들겨 풀기를 빼는 과정을 거쳐 밀가루 푸대는 동생의 기저귀가 되었다. 그 기저귀는 그 후 3년 후에 태어난 작은남동생도 썼다. 그러니까 내가 밭가 도랑물에서 똥덩이를 떨어뜨려 헹구고, 빨래터에 가서 빨아오던 기저귀는 두 동생이 같이 쓰는 사이에 거칠던 광목천이 낡아져 부드러운 기저귀가 되어 있었다. 그 기저귀가 모자라기도 했을 것이고 어느 정도는 새 기저귀를 마련하고 싶었을 어머니가 새 천으로 기저귀를 만들게 된 것이다.
남동생들이 쓰던 기저귀는 정사각형에 가까웠고, 어머니가 새로 만든 기저귀는 옆으로 긴 사각이었다. 그 두 가지 형태의 기저귀는 개는 방법도 달라야 했다. 나는 남동생의 기저귀를 빨았던 것처럼, 여동생의 기저귀도 빨았다. 지금에야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것이지만, 아직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나로서는 이 세상에 세탁기란 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동생의 기저귀든 동생들의 옷이든 손빨래는 당연한 일이었다. 동생이 태어난 1973년에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고, 그 다음 해에는 공동 수도가 들어왔다. 마을 길 한쪽을 돌담을 에워싸고 수도관을 끌어와 만든 수돗가는 육지의 우물터 같았다. 빨래를 할 정도로 넓지는 않았고 사람들이 물을 길러 오기 때문에 나는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바닷가 민물이 나오는 곳까지 빨래를 지고 가서 빨았다. 날이 추워져서 바닷가 빨래터까지 못 갈 때는 공동수돗가에서 빨래를 했다. 빨래를 하고 나면 짐은 무거워졌지만 대바구니에 짊어지고 돌아와 마당의 빨래줄에 널고, 돌담에도 걸쳐 널었다. 각 가정마다 개인 수도가 들어온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1985년 가을에 나는 아기를 낳았다. 딸아이의 기저귀를 어머니가 하던 대로 만들었다. 시장 포목점에서 면천을 한 필 샀더니 기저귀 길이대로 잘라 주었다. 집에 돌아와 가장자리를 공구르기 바느질 방법으로 꼬맸다. 산골짜기에 있던 그 집은 집 앞 개울에 있는 우물에 수도관을 묻어 물을 끌어다 썼다. 겨울에는 수도가 얼었다. 기저귀를 넉넉히 준비하지는 못했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으로 기저귀를 빨았다. 빨래줄에 널린 흰 기저귀가 바람에 춤을 추듯 펄럭일 때, 나는 그 광경을 보는 게 좋았다. 아기 얼굴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사랑스러웠다. 나는 어린 어미라는 동물의 감각으로 그 시간에 빠져 있었다. 아기가 백일이 될 무렵, 제주도로 왔다. 기저귀도 갖고 왔으나 넉넉히 가져오지 못했다. 동생들이 쓰던 기저귀를 내 딸도 썼다. 딸은 기저귀를 뗄 때까지 나와 있다가 말을 시작할 무렵 나와 헤어졌다.
1990년 2월에 아들을 낳았다. 아기 낳기 두어 달 전에 나는 어머니에게서 배운 대로 기저귀를 준비했다. 사실은 어머니가 내 출산용품을 같이 준비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딸아이 때야 아이를 낳고서야 내가 육지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을 부모님께 알렸으니까, 어머니가 첫 손주 때 해 주지 못한 걸 마음에 두고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 아기의 기저귀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해 주시기만 하면 사랑을 받는 느낌이 클 것 같았다. 내 아기도 할머니에게 예쁨 받는 아기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어머니는 그건 너희 시어머니에게 이야기하라며, 기저귀감이 시어머니에게 있다고 하였다. 결혼식 때의 어떤 절차에 두루마리로 면 천 한 필을 보낸 게 있으니, 그걸로 기저귀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에게서 어머니의 말을 전하고 천을 받았다. 친정 어머니가 딸의 출산용품을 준비해주면서 같이 기저귀를 만드는 그림은 어디서 본 것일까. 나는 그 그림에 목말라 있다가 혼자서 양팔을 벌려 천을 자르고 양쪽에 공그리기 바느질을 해 기저귀를 만들었다. 딸아이 때보다는 기저귀 개수를 늘렸고, 백일까지 쓸 기저귀는 접었을 때 얇게 되도록 작게 만들었다.
아들을 병원에 가서 낳았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내 삶이 좋아진 거라고 느꼈다. 딸아이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는 방에서 혼자 낳았지만 아들은 병원에서 낳을 수 있게 된 게 기뻤다. 내가 아프다고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하자 아이의 아빠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 준 게, 고마웠다.
 
5년 전, 의성에서 딸아이의 아빠는 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자 어른들을 데리고 오겠다며 나갔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는 혼자 돌아왔다. 읍내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였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서 어디를 다녔던 것일까. 누나와 어머니를 만났는데 산모가 배가 아프기 시작해도 아기가 빨리 나오는 게 아니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아팠지만 병원으로 가자는 말을 못했다. 대학교 3학년이던 그는 이웃집의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로 나가서 그날 마침 그의 논에서 벼수확을 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갔고, 읍내 사는 누나에게도 갔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와서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을 전하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진통을 산전진통인 줄 모른 채 나는 혼자 남겨졌다.
어른들의 말을 전해 들은 나는 내가 배가 아프다고 한 게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감쪽같이 배가 아프지 않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변을 보고 싶어서 화장실에 가니 밑이 빠질 것 같고 오줌이 아닌 것 같은 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배가 아파 오다가 멈추었다가 다시 아팠다. 나는 위험해지고 있었다. 내가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꼈으므로 밖에서 재래식 변소를 들락날락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 점점 아파오는 배를 움켜잡고 엎드려 보았다. 방구석에 개어놓았던 이불 위로 엎드려 보았다. 전신을 뚫고 파헤쳐지는 듯한 아픔이 어떻게라도 참아 보려는 의지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허리의 뼈가 지진이 나서 갈라지는 땅처럼 쩍쩍 벌어졌다. 고통에 무너진 뼈 들이 살 밖으로 나와 부서질 것 같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밖에서는 인기척도 없었고 사람을 부르러 나갈 수도 없었다. 산골짝에는 세 집이 있었는데 모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화조차 없는 그 집에서, 이 방에서 이제 나는 죽을 건가 싶었다. 아기를 낳다가 죽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힘에 부쳐서 더는 어떻게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는 어떻게도 하지 못하겠다는 상태에서도 있는 힘을 다 짜내야 하는 것도 알았다. 알았지만 더 이상의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포기해버리면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질 거라는 걸, 내 몸이 으르렁대며 나를 위협했다.
아기가 나왔다. 제멋대로 살이 찢어졌는지 피가 흥건한 내 다리 아래에 가느다랗게 아기가 울었다. 나는 어떻게 하는 줄을 몰랐다. 아기를 보려고 했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참 후 저녁이 다 되어 돌아온, 아이의 아빠와 할머니는 내가 순산을 한 거라고, 아이를 쉽게 낳았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겪은 몸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통증은 이미 죽음의 고비를 훨씬 지나 있어 잊혀지고 있었고 내 앞에는 몸이 몹시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나는 아들을 못 낳고 딸을 낳아서 죄송하다고 아이의 할머니에게 말했다.
 
이 경험 때문에 나는 아들의 아빠가 그 전날 술을 마시고 왔고, 다소 부부싸움이 되었으며 나를 속상하게 하는 말을 하여 그 밤에 대문 밖으로 나가 울었던 일을, 그러려니 넘어가야 할 일로 여길 수 있었다. 아이를 낳을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는 지극히 상식적인 남자의 일을, 마치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구해준 일처럼 크게 고마워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큰 잘못은 작게 되고, 작은 고마움은 크게 부풀려졌다. 그것은 아들의 아빠와 살아내는 나의 방법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3주 동안 어머니가 내 몸조리를 해주었다. 쑥물에 몸을 씻겨 주었고, 세끼 밥도 챙겨주었고, 젖 몸살이 날 때는 더운 수건으로 맛사지도 해 주었다. 아기를 씻겨 주었고, 밤에 아이가 울 때 나를 재우려고 아기를 안아 재워주었다. 나는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오래 기억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목 말라하던 어머니의 정을 산후조리를 받으면서 꿀꺽꿀꺽 마시는 것 같았다. 내 아기가 내 젖을 빨 듯이, 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을 남김없이 먹었다. 어머니가 나를 낳고, 몸조리를 잘 못했다는 말을 그때 들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할머니들이 서로, 그 일을 미루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던 그때 외할머니는 40대였고 내 친할머니도 50대 초반이었다. 젊은 여자들이었던 이 할머니들은 아기를 낳은 사람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 잘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자기 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어머니가 내 몸조리를 해 준 것은, 할머니들에게서 받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메밀가루를 넣은 미역국, 옥돔국을 만들어 주었다. 50이 채 되지 않은 어머니는 농사일에 무척 바빴지만 세끼 밥을 해 주고 방까지 상을 들고 와 먹으라고 했다. 바쁜 어머니에게 더 이상 신세를 지는 게 미안했다. 어머니는 농사일로 몹시나 몸이 고단한 상태였는데도 딸의 몸조리를 해주어야 할 일로 여기고 있었다. 산후조리원 같은 시설은 없던 때였다. 나는 한 달 예정으로 갔던 친정집에서 3주 만에 셋방으로 돌아왔다.
아이 아빠에게 집은 잠을 자러 오는 곳이었을 뿐이라, 밤에 아기가 울면 짜증을 냈다. 애가 울자 던져 버리라는 말도 서슴없이 하였고 나 대신 아기를 안아주거나 재워주지 않았다. 나는 내 아기를 다른 남자에게서 데려온 아기처럼, 그 사람 눈치를 보며 키우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자기 애를 귀여워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돈을 버는 일에 쫓기는 바람에 아기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목욕을 하러 다녀오느라 아기를 한 시간 정도 맡긴 날이었다. 목욕탕에서 대강 씻고 돌아왔을 때 나는 저 남자에게 다시는 내 아기를 맡겨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아기가 자지 않고 울기만 하자 그는 어떻게도 달래지는 못하고 아기 얼굴에 젖병만 밀어 넣으며 먹어라 먹어라 화만 냈던 것 같았다. 그럴수록 아기는 더 울었겠지. 아기 얼굴이 젖병에서 흘러나온 우유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이 아빠와는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돈을 벌지 않는 때에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마땅히 있어야 할 부부간의 정이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으나, 생활비를 벌어다 주는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아기에 대해서는 그와의 자식이라는 생각보다 내 아기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아들과 며느리가 임신 소식을 전한 건 작년 여름이었다. 오래 기다렸던 소식이었다.아기가 태어나면 입을 옷이나 덮을 이불, 타고 다닐 유아차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작년 가을, 일본에 있는 동안에도 그랬다. 백화점 유아 코너에 전시된 신생아용품에 마음이 뺏겨 아직 입으려면 몇 달이나 있어야 하는 배냇저고리를 사서 한국으로 보냈다. 일본에서 돌아올 때 사서 가져와도 될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내가 느끼는 아기용품에 대한 감정을 아들 내외도 미리 느끼게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기업들은 어떤 경로로 내가 할머니가 된 것을 아는 건지 내게 자꾸만 아기용품 광고를 보냈다. 출산용품을 준비해 주고 싶어서 아들 내외에게 이야기했는데, 함께 간 곳은 내가 알고 있던 <아가방> 같은 브랜드 가게가 아니었다. 예쁘고 고급한 것이라기 보다 실용적인 물건들이 많았고 가게 분위기도 그랬다. 일본 백화점에서 봤던 게 있어서 준비해갔던 돈의 일부만 썼는데, 아들내외는 많이 산 거라고 했다. 뭔가 미진한 느낌이 남았다.
다 준비를 못해 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스마트폰에서는 아기용품이 계속 해서 귀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기용품 중에는 기저귀도 눈에 띄었다. 재질 좋은 천에 예쁜 그림이 프린트된 천 기저귀들이 아기의 개월 수에 맞추어 크기가 다르게 나와 있었다. 지난번에 아들 내외와 함께 가서 샀던 기저귀가 6개월 이상 된 아이의 기저귀였다는 것을 알았다. 신생아용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신생아용 기저귀를 주문했다.
하지만 어린이집을 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내가 30년도 더 된 낡은 생각 속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요즘 엄마들은 천 기저귀를 쓰지도 않고 잘 모른다는 것이다. 손주가 집에 오고 나서야 더 확실히 알았다. 신생아용 일회용 기저귀가 있었고 그게 조그만 아기의 몸에 딱 맞았다. 종이 기저귀마저 이렇게 예쁘게 나오는 세상인 것이다. 이제는 노란 고무줄을 배에 두르고, 비닐을 한 위에 천기저귀를 대어서 그 고무줄 속으로 밀어넣는 식의 기저귀는 사라진 세상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아기 기저귀를 사용했던 때는 이제 50이 넘은 내 동생의 시대, 그 보다 나중에 내 아들을 키울 때도 기저귀 커버가 있어서 노란 고무줄은 사용하지 않았고, 그때도 종이 기저귀가 나오긴 했다. 내가 가난해서 안 쓰는 물건이었을 뿐이다. 내 여동생의 아이들은 종이 기저귀도 쓰고 천 기저귀도 쓰면서 컸고, 지금은 천 기저귀를 굳이 쓰려고 하지는 않는 때가 되었다. 천기저귀가 제품으로 나오는 걸로 봐서는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옛 물건 같은 느낌이다. 손주의 기저귀를 보면서 내가 쓰던 기저귀를 생각했다. 나로선 볼 수 없는 60년 전의 내 기저귀를 그려 보았다. 버리기 직전의 낡은 런닝구를 찢어서 만들었을 것 같은 내 기저귀를 그려 본다.
 
이제 나는 마음이 놓인다. 손주 핑계로 나는 신생아용품 가게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천 기저귀를 사 보았다. 천 기저귀 대신 헌 옷으로 기저귀를 채웠던 나에게, 제일 좋아 보이는 기저귀를 골라 주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내 손주에게 주려고 뭘 사겠다거나 만들겠다는 것이 다 아기였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 어린 엄마인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들이다.
나의 60년이 손자를 따라와서 받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나는 아기였던 나에게 기저귀를 사준다. 예쁜 옷을 사주고, 몇 달 후에는 유아차를 사줄 생각이다. 그걸 살 생각을 하면 그걸 받고 좋아하는 어린 나와, 가난한 여자가 있다. 그들이 웃는다. 물건으로라도 사랑을 확인받아 안심한 얼굴로 웃는다. 2024.04.04, 김미정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