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2024년 日記帳

글잉걸 15 쌀밥

자몽미소 2024. 4. 25. 11:58

쌀밥
 
딸이 쌀 한 포대를 주문해서 보내왔다. 향기가 난다고 수향미라는 이름이 붙은 쌀이었다. 주문을 받은 후에 도정을 해서 보내준다고 한다. 쌀 냄새도 좋았지만 쌀이 익어가면서 집안에 퍼지는 밥 냄새가 푸근하다. 며칠 동안 냄비에도 해 보고 솥에서도 밥을 해 보고 있다. 전기밥솥에서 밥을 할 때와는 다르게, 쌀을 미리 씻어 놓고 불리고 보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불조절도 하다 보면 어느새 재밌는 친구와 노는 듯하다. 밥을 푸고 나서 누룽지도 만들어 보았다. 마른 누룽지로 먹어도 끓인 누룽지로 먹어도 구수한 맛이 돌고 속이 편안해진다.
 
“쌀밥만 있으면 반찬이 없어도 되지 뭐!”
며칠 동안 쌀밥과 깍두기만 먹으며 혼자 지낸 적이 있다. 여고 1학년 동안 자취를 하며 난방도 안 되고, 부엌도 없는 방에서 혼자 지내던 나는 작은어머니와 아버지가 시내로 이사를 온다는 말을 듣고, 그 식구와 함께 살고 싶었다. 책상과 이불, 곤로 정도뿐인 내 짐은 작은아버지어머니가 이사 오기 며칠 전에 먼저 셋집에 옮겨 놓았다. 그날 문을 열어주러 왔던 작은어머니가 시장에 가자고 하였고 흰쌀 한 되와 무 깍두기 한 봉지를 사 주었다. 서문시장이라 불린 재래시장에는 콩자반이나 멸치볶음 같은 반찬거리를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었을 테지만 며칠 먹을 반찬으로 작은어머니는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깍두기 하나만 샀고 쌀밥만 있으면 반찬은 필요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작은어머니와 아버지, 사촌들이 이사 오는 날까지 방 두 칸에 부엌이 하나인 셋집에서 혼자 있었고, 전기밥솥에서 밥을 하고 비닐봉지에 싸 온 깍두기만 먹으면서 지냈다. 작은어머니 말대로 흰쌀밥만 먹어도 괜찮았다. 제삿날이나 명절에만 먹는 고운 밥이라 해서 곤밥이라 부르던 흰쌀밥을 지어서 혼자 먹었다. 반찬이 깍두기뿐인 것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국도 있고 반찬도 있는 밥상에서 제대로 밥 다운 밥을 먹고 싶었다. 그러나 함께 살아보니 작은어머니는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돈이 들어가는 시내에서의 생활에 겁을 먹어 절약만이 살길이라 여기고 있었다. 작은어머니와는 1년을 함께 살았다. 내 밥을 해주었고 도시락도 싸주었다. 하지만 작은어머니가 해주는 밥은 맛이 없었다. 도시락을 가져가도 친구들에게 내놓기 부끄러웠다.
어떻게든 잘살아 보겠다며 시골에서 시내로 집을 얻어 나온 이 부부는 모든 면에서 절약을 하였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 막내까지 사촌동생은 세 명, 아이 셋을 데리고, 나까지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작은어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살림방법은 먹는 일, 입는 일에 돈을 쓰지 않는 거였다. 장차 시내에 번듯한 집 하나를 마련하는 게 꿈이었던 이 부부에게 쌀밥을 지어 먹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제주도에서는 보리쌀에 쌀을 섞어 짓는 밥을 반지기밥이라고 했다. 작은어머니도 보리쌀에 흰쌀을 조금 뿌려 반지기밥을 했으나 쌀값을 아끼느라 일반미가 아니라 통일벼 품종의 쌀을 섞어 지은 반지기 밥은 질척거리고 밥맛을 느낄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한 해 동안 작은어머니 밥상 앞에 앉으면 밥이 먹기 싫고 반찬도 보잘것없어서 불만이 가득 했지만 그 마음을 감추어야 하니까 반찬 타령은 물론 밥이 어떻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실랑이라면 밥을 조금만 달라는 거였고, 그럴수록 작은어머니는 학생은 많이 먹어야 한다며 깊은 밥공기 수북이 밥을 떠주었다.
 
그렇게 절약하면서 살다가, 내가 대학에 들어간 2년 후에 작은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는 오늘 아침 흰밥을 먹고 40년도 더 전에 죽은 한 여자를 떠올리면서 그녀의 밥을 먹던 그 시간으로부터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는 사이의 시간이 2년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작은어머니와 작은아버지의 잦은 부부싸움을 보다가 3학년이 되어서는 다시 자취생활을 했다. 다음해 대학에 입학한 후 어느 봄날에 작은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같은 동네에서 다른 셋집으로 이사했는데, 이전 셋집보다 더 작은 집에 사촌들의 옷가지며 살림이 어지러웠다.
작은아버지는 일을 가고 없고 작은어머니는 힘없이 누워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일어나 앉았다. 방 한구석에 이동식 접이의자가 있어 저게 뭐냐고 물어보니 서울의 원자력병원에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서울에 다녀오느라 돈이 많이 들어 버렸다고 걱정했다. 그리고 자신이 위암에 걸렸다는 말을 감기에 걸렸다는 말처럼 가볍게 했다. 나는 위암이 어떤 병인지를 알지 못했다. 서울까지 가봐야 할 만큼 보통 위가 아픈 것과는 다른 것이겠거니, 조금 길게 치료해야 하고 조금 더 큰 병원에 다녀야 하는 병이겠거니 여겼다. 작은어머니가 돈이 많이 없어서 대학입학선물로 옷을 맞춰주겠다는 약속을 못 지킨다고 미안해 했다. 원자력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라고 했으나 수술비로 저축해 놓은 돈을 다 써 버리면 장차 아이들 셋을 어떻게 키울 거냐고, 수술을 포기하고 왔다고도 했다. 이미 중증의 환자였음에도 환자 본인도, 나도 곧 마지막이 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 서른다섯의 여자가 평소와 달리 몸이 좀 나빠진 일로 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고, 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 많았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엄마가 죽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작은어머니는 모든 좋은 것을 시내에서 번듯하게 집을 지어 이사한 다음으로 미루었다. 어디선가 사은품으로 스텐 냄비를 받아도 쓰지 않고 장롱 위에 모셔두었다. 그을린 양은 냄비를 수세미로 박박 밀면서 장롱 위의 냄비들을 바라보며 흐믓해 했다. 꿈에 그리는 그녀의 집에서 새 냄비를 쓰는 날이 오기를 소망했다. 병 진단을 받은 후 반 년도 못 가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작은어머니의 냄비는 그녀의 죽음과 함께 폐기되었다.
 (이어서 쓰기, 쌀밥을 먹는 집)



(2024년 4월 25일 오전 10시 56분, 김미정 쓰다. 1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