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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잉걸 6-기저귀의 추억

기저귀의 추억 “언니 어린 시절이 이랬다고? 언니가 아니고 할머니가 겪은 옛날이야기 같아!” 밭 도랑에서 기저귀를 빨았다는 내 글을 읽은 막내 동생이 말했다. 이제 오십 초반의 동생에게, 글에 나오는 나는 60세의 언니가 아니고 여덟 살의 아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동생은 내 부모가 눈치껏 알아서 집안일을 하는 딸에게 너무 무심했던 거라고, 결론지었다. “언니와 나랑 아홉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어린 시절 기억은 너무 다른 것 같아!” 어딘가 미안한 마음으로 동생이 말했다. “기저귀 말인데, 우리집에서 제대로 된 기저귀를 한 건 너 부터였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기저귀 없이 아기를 어떻게 키우냐고, 동생이 말했다. 남동생 둘 아래로 여동생이 태어난 건 내가 열 살이던 1973년 여름이었다. 동생이..

글잉걸 5- 냄새가 있는 선물

Morning Letter Greengirl 5-냄새가 있는 선물 아들의 머리가 아기 침대에 누워 있던 손자를 덮고 있다. 기저귀에 파란 줄이 보이면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고, 똥을 쌌을 때는 냄새로 알 수 있다며 코를 대고 확인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난 지 보름째, 아들 내외는 아기 똥에서는 요구르트 냄새가 난다고 했다. 샛노란 색일까 했는데 기저귀 안에는 여름 풀처럼 싱싱하고 푸르지만 묽은 상태의 똥이 한 숟갈 정도 양으로 기저귀를 묻히고 있었다. 나도 머리를 기울여 아기가 내놓은 똥에 코를 대본다. 나에게는 다른 냄새가 났다. 맡으면서 이걸 뭐에 비교할 수 있나 떠올려 보았지만 비슷한 무슨 냄새도 생각나지 않고 뭐라고 할 수 없이 달콤하고 즐거워진 느낌만 남았다. 이런 냄새를 싫어할 수 있을까. ..

글잉걸4- 이어 나가는 마음

Morning Letter Greengirl 4- 이어 나가는 마음 여동생이 아기를 보러 왔다. 구토 방지 쿠션 안에 뉘여진 아기의 몸 위로 나와 동생의 머리가 우산처럼 덮인다. 고개를 든 동생의 눈이 붉어 있었다. 동생이 열아홉이 되던 해에 나는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때도 동생은 아기를 보러 학교가 파하자 병원으로 왔다. 눈 한 쪽만 떴다 감았다 하는 조카를 본 여학생은 왜 이러는 거냐고, 아기 눈이 왜 이런 거냐고 말해서, 어머니에게 등을 한 대 세게 맞았다. 아기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 거라고, 아기가 예쁘다는 말도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삼신 할망이 듣고 말과 반대로 해 버린다고. 동생은 조카를 다시 사랑하기 시작했다. 다시, 라고 말하는 것은 동생이 이전에 사랑했던 조카가 있기 때문이..

글잉걸3-손자를 만난 날, 할머니를 읽다

Morning Letter Greengirl 3-손자를 만난 날, 할머니를 읽다 산후조리원에서 돌아온 손자를 만나러 갔다. 태어난 날 병원에서부터 조리원에 가서도 아들은 매일 아기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과 영상으로 손자를 보며 매일매일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가까이 찍은 사진에서는 살이 통통히 올라 있고 표정도 다양해져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거구나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아기는 정말 작았다. 너무 작아서 얼른 만질 수가 없었다. 만나자마자 내가 할머니야! 라며 눈물을 흘릴 것 같았지만,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만 가득 올라왔다. 작은 몸에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는 것도 신기했다. 내 주먹보다도 작은 얼굴에 이마와 눈썹, 눈과 코, 입술, 볼, 머리카락과 귀..

글잉걸 2-빨간 도장이 비친 등불

Morning Letter Greengirl 2 어제 저녁 무렵,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계약서에는 내가 갑이고 그 회사는 을로 칭해 계약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그 회사의 인장이 찍인 종이 계약서 위에 당산서원의 인장을 꾹 눌러 찍고, 동의 계약서를 메일로 보냈다. 일단, 3월 27일부로 계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 손에 잡히는 것,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책상 위에 있었다. 마음 밑바닥에 들러붙어 끈적거리던 불안이 성능 좋은 세정제로 닦여나가는 것 같았다. 우선은 이 계약이 성사 될 것인가 했던 불안, 지난 해 가을에 번역원고를 제본해서 일본에 가져갔고, 지인들에게 건넸고, 그런 후 번역하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안게 된 후 함께 안을 수밖에 없는 불안이었다. 번역할까 말까 하는 출판사의 회의가 있..

글잉걸1-뭐라도 쓰기(책상앞)

Morning Letter of the Greengirl-1 느닷없이 써본다. 이것은 편지일 수도 있고, 나의 독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젯밤 읽은 한 줄의 문장 때문에 나는 이렇게 무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노트북을 열었다. 글은 비비언 고닉의 의 책 안에 있었다.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일을 해,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열심히 일을 해. 하지만 난 열심히 일할 수 없어. 꾸준히 일하는 법도 간신히 배운 참이라, 열심히는 절대 못하겠어.” 어젯밤에 나는 이 문장을 공책에 만년필로 옮겨적어 보았다. 눈으로 볼 때보다 손으로 적으면서 이 문장을 발견한 게 내게 온 선물 같아졌다. 나에게 말을 거는 문장을 만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