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제주의 소리>에 올렸던 글, 도둑질 하듯 빼오다.

자몽미소 2007. 7. 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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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왜 말이 안 통할까'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민들레의 책읽기①] 이와츠키 켄지의 「 당신과 왜 말이 안 통할까」
2004년 07월 13일 (화) 00:00:00 민들레 시민/객원기자

이 책은 읽고 나니 눈이 단정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과 대화를 한 느낌이다.

대개의 상담개론서에는 문제를 많이 가진 이와의 상담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은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는 일이라고 한다.

“공감적 경청”이라고 일컬어지는 상담의 기본은 내담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내담자가 고민하고 갈등하는 상황을 주의 깊게 들어주면서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 문제를 스스로 바라보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상담센터를 나와서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 나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

는 속 깊은 상담가는 없으며 나를 옥죄어오던 주위의 억압과 폭력은 그대로 살아 있을 뿐이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 일이 계속 되다보면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 두게 되고

 심해지면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게 되어 모순덩어리의 자신을 데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자기의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일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돌이켜보면,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상처였으나 어느덧 타인에게 상처주는 일 따위에

무감각해진 것 같다.

부모님의 양육태도를 못마땅해 했으면서도 사랑하는 아이에게 어릴 적

 내가 경험했던 아픔의 경험을 되물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변화되어야 할 나는 늘 내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금도

 누군가 나를 향해 던지는 날카로운 말 한 마디나 무심한 행동에 민감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나를 상처 내는 무신경한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일까를 아는 것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를 풀어 보려는 이 책은

인간관계에 대한 나의 가치관이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냉철한 충고를 해 준다.

마음의 감도가 높은 이가 어떻게 상처를 받게 되는지 마음의 감도가 높은

 아이의 가정에서 아이는 어떤 딜레마를 가지게 되는지도 살피다 보면

지금 자기가 처한 문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어렴풋이 길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문제를 알고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결단을 필요로 하며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저자는 우리들의 삶이 대개 상대를 잘못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므로

결국 누구를 어떻게 사귈 것인가의 문제를 거론한다.

마음의 그릇, 즉 마음의 강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을 이해해 줄 타인을

만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은 불행하지만 사실이다.

그러므로 타인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지 말고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건설적이라고 제안한다.

저자의 제안은 맞는 말이지만 불공평하고 쓸쓸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마음의 감도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것이라면 상처

받기 쉬운 자신이 타인들의 무감각에 의해 상처내도록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마음의 감도가 높은 사람에게 마음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생의 축복이다.

그것이 애인이거나 남편이거나 아내가 아니어도 소중한 타인은 생의

 보물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생에 다가온 소중한 것들은 더욱 더 감사히

바라보게 되었다.

행복은 나를 소중히 하는 데서부터 비롯되고 그 힘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서 발견되는 일인 것 같다.

책의 끝장까지 차근차근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었다.

절친한 친구와 대화를 하고 난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일에 대해 용기가 나는 책이었다.

- 위의 글은 인터넷 서점의 독자서평란에 올린 민들레님의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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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의 욕망을 되돌아 보기
[민들레의 책읽기②]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를 따라가 보니
2004년 07월 15일 (목) 00:00:00 민들레 시민/객원기자

존 라이언과 앨런 테인 더닝이 지은 '녹색시민구보씨의 하루'는 한국인의 실정에 맞게 재 편집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도시민인 우리가 경험하는 물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오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 무심코 쓰고 무심코 버리는 일들 속에 내재된 우리의 무신경과 욕망이 어떻게 인간 환경에 해로움을 주고 있는지 살피는 일은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스스로를 소비자로 여겨본 적이 없는 구보씨, 그의 하루를 따라가 보면 스스로를 낭비하는 소비자라고는 여기지 않았던 일이 굉장한 오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녹색시민이라고 자처하는 한 사람의 일상을 따라가 보니 일반적인 한국인 한 사람이 매일 1인당 1kg 정도의 쓰레기를 버리며 54kg정도의 자원을 소비한다고 한다고 하는데, 우리들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쓰고 버리는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와 소비하는 자원들은 다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란 말인가?

한 잔의 커피가 내 입으로 오기까지, 그 커피를 싸고 있는 종이컵과 깡통, 아침을 여는 신문, 신발장을 가득 메운 운동화와 구두, 색깔별로 또는 기능별로 이런 저런 욕구를 채우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는 물건들의 공해에 묶여 있으면서도 우리들은 깨닫지 못한다.

자동차 한 대가 굴러 가기 위해서 모여지는 자원들의 긴 행렬이라든지, 다국적 기업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자전거 같은 물건들이 정작 가난한 사람들과 그 터전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도시의 일용품으로까지 등극한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에까지 우리들이 늘 무심코 손을 건네고 몸을 채웠던 것들이 산업 사회의 거대 욕망의 그물에 걸려든 것들임을 알아차리는 일은 충격적이다.

그 많은 소비와 소비의 욕망들이란 게 자연의 한 부분이어야 할 우리들이 스스로를 과오의 늪으로 빠지게 하는 일이었다니.

새삼스럽게 그걸 깨닫도록 도와준 이 책의 주문은 단 한 마디, "흔적을 남기지 마시오"였다.

마치 수도승의 목소리처럼 의미심장한 이 말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의무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이 책은 부록을 통해 "그러니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말한다.

그 대안이라고 해야 작고 작은 몸짓에 불과하지만, 결국 "그대여! 녹색시민이 되어라" 인 것이다.

녹색시민이 되어 '녹색시민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왜 소비를 해야 하는가를 묻는 일에서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때때로 우리는 더 나은 게 뭐 없을까 하는 공허감에서 소비를 즐기고 자기가 속한 지역에 만족하지 못할 때 여행을 가면서 자원의 소비자가 된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고 우리 몸이 욕망의 그물에 걸려 들 때, 스파이더맨의 그물보다 더 강한 산업사회의 그물은 우리의 정신과 삶을 구속한다.

그러므로 질문을 하라, 이것이 꼭 필요한 물건인가? 왜 이것을 사고 싶은가?

그 질문은 우리 삶에서 잃어버리기 쉽지만 소중한 것, 물질이 아니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찾아야 할 가치들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내 삶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걸어가고 있는가? 당장 돌아볼 일이다. 내 소비의 욕망은 어디에 와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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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열정, 당신의 유령난초는 어디에 있는가?
[민들레의 책읽기③] 수잔 올린의 「난초도둑」
2004년 07월 19일 (월) 00:00:00 민들레 시민/객원기자
"이 세상은 무한히 크고 사람들은 늘 그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 너무나 많은 생각들과 사물들과 사람들이 있고, 나가야 할 방향 또한 무수히 갈라져 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뭔가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이 거대한 세상이 좀더 다루기 쉬운 크기로 깎아 다듬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무한하거나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 「난초도둑」 본문 176 쪽

난초 채집꾼 존 라로쉬를 탐구하는 그녀, 수잔이 떠올린 생각이다. '뉴요커'의 객원기자인 수잔은 존 라로쉬를 만나러 플로리다로 갔다. 그녀는 플로리다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존 라로쉬라는 기이한 인물을 취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존 라로쉬는 허술한 법망과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기생적인 인물이며 자본 추구와 자본 증식 욕망이 만연해 있는 백인 사회에서 백만장자를 꿈꾸고 있는 자이다.
이 욕망 덩어리의 보잘 것 없는 남자를 취재한 논픽션의 글이 이 책이 되었다. 작가 수잔 올린은 존 라로쉬의 난초에 대한 열정이 어떻게 생겨나고 자라는지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녀는 존 라로쉬의 유령난초를 보고자 인디언의 숲으로 갔다.

작가는 존 라로쉬의 유령난초 불법채취 사건을 취재하며 존 라로쉬라는 인물의 마니아적 근성과 열정을 알게 되고 그의 개인사와 그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것은 플로리다의 덩쿨 식물처럼 엉켜 있으며 플로리다 토지 사기 사건, 인디언들의 수난의 역사와 세미놀 인디언들이 어떻게 미국 사회의 욕망과 대결하고 있는 지도 취재하게 된다. 취재 도중 그녀 또한 존 라로쉬의 마니아가 되었으며 난초를 향한 가슴을 펼친 인물이 되어간다. '난초'라는 식물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은 헛되고 헛되지만 그 헛됨에 매몰되어 사는 인간들에게 난초는 삶의 가장 큰 에너지이다.

존 라로쉬는 난초와 관련되어 있고 난초 채집꾼은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식민지 지배와 관련돼 있다. 그녀는 존 라로쉬의 열정을 보기 위해 역사와 땅에 관련된 또 다른 인간 집단을 연구해야 한다. 플로리다 주는 미국적 욕망을 끌어 들이다가 어느 날 아침엔 태풍의 힘으로 그들의 모든 걸 멸망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난초에 대해 열광하고 난초는 인간의 욕망을 교묘하게 비틀어 댄다.

이 책은 다시 메릴스트립이 주연한 영화의 원작이 되어 새롭게 태어났지만, 영화와 이 책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영화와 책이 공유하는 요소는 자기만의 아름다움,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에너지에 매료된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 꿈결같다는 유령난초란 원래 없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시간을 담보하여 음흉한 습지를 지나고 길이 보이지 않는 밀림을 지나야만 나무에 숨은 듯 자라고 있는 이 유령난초 볼 수 있다. 그러나 취재를 나갔던 수잔은 끝끝내 이 유령난초를 볼 수 없었다. 난초 채집꾼에게 신비한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유령난초란 이 생을 존재하기 위해 꾸며낸 전설일까.
우리의 남루한 생이 어느 날 활짝 핀 난초꽃처럼 되리란 믿음, 붙잡을 아름다움을 위해 자기 생을 거는 맹목은 어리석은 자의 행위처럼 부질 없는 그것이지만 그래도 당신, 훔쳐내고 싶을 만큼 강렬한 그 무엇, 유령난초를 찾아 걸을 수 있는 생의 뜨거움을 가지고 있는가?

그대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찾으며 여기까지 왔으며 또 걷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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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의 삶 찾기,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
[민들레의 책읽기④] 김동선의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
2004년 07월 29일 (목) 00:00:00 민들레 시민/객원기자
현재 고령화율 20%를 바라보는 일본은 이미 고령화 사회의 전형이 됨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노인복지에 쓰고 있는 나라이다. 고령 사회의 특징은 전기 고령자( 65-74세)에 비해 후기 고령자(75세 이상) 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데 있는데 후기 고령자는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치매나 전신불수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 일본 또한 세계 최고령 국가로서 고령화에 대처해 왔음에도 일본의 노인들은 길고 긴 노년의 시간을 생각할 때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야마토마치의 노인들은 말년을 자신이 살아온 집에서 살면서 가족 수발에 따른 감정적인 피폐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던가? 저자는 우리나라도 최근의 경제성장에 따른 가족구조의 변화와 고령화의 문제가 일본과 다르지 않다는 데 주목하고 일본의 노인복지시스템을 연구하였고, 그의 발품을 따라 일본의 복지정책과 복지시스템을 둘러 본 결과 이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아이 하나를 기르면서 직장일과 공부와 육아에 지친 나는 우리 아들을 독자로 만들어 버렸고 여유가 생겨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했을 때는 이미 내 나이가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 직장과 공부를 병행하며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전투적이 된 젊은 엄마에게 아이는 굉장한 짐이 되기도 했었다. 비교적 건강하게 컸다고는 해도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다른 많은 일들에 우선해서 힘들었다. 그런데 대개 직장을 다니며, 거기다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또다른 모색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요즘의 젊은 엄마에게 양가 부모중 어느 부모라도 아프거나 해서 병수발이라는 자식된 도리를 요구한다면 어떠한 결정을 하여야 할까?

친구와 동료들이 조심스럽게 그들이 직면한 고단함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결혼한 친구들은 시댁식구와의 갈등을 가장 먼저 내 놓는다. 그들은 까다로운 시어머니의 병원 입원과 같은 일들이 자신의 생활을 무너뜨린다고 힘들어 하고, 노후에 대한 경제적인 염려 때문인지 자식들의 경제를 모른 척 하는 시부모의 마음을 이해 하기도 힘들어 한다. 사소한 가족의 갈등은 현재의 삶을 피곤하게 한다. 더구나 착한 며느리 역할을 하느라 자신의 공부 따위를 포기 했거나 하는 경우,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한 경우에 시댁과의 골은 깊고 깊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어 준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손바닥 뒤집듯 내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아이러니다. 나에게 이야기 하는 친구가 내 올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가족에 대해서만은 이해와 관용이 넘치기를 바라는 건 내가 시누이의 입장만으로 내 부모의 상황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부모는 자식에게 끝까지 효도를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딸인 나의 입장이지 냉정한 입장에서 우리부모와는 혈육지간이 아닌 올케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 부모님이 노후하시고 보살핌을 받을 연세가 되면 며느리 보다는 딸이 낫겠지 싶어서 여동생에게 부모님은 우리가 모시기로 하자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다. 어떤 갈등이 이러한 효심을 갉아 먹을 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아닌 사위는 어떠한 태도를 보일까. 모두 막연한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곧 닥칠 일이며 주위의 사람들은 곧잘 아이의 양육보다는 부모의 부양을 힘들어 했다. 특히 노후는 어린 세대와 달리 병에 걸리는 확률이 높고 일단 병이 들면 병원의 처방에 따라 환자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부모가 환자가 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병원 시스템은 당연한 듯 가족의 시간을 요구한다. 요양을 요하는 부모를 모시는 가족에겐 가족간 갈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자칫 '장병에 효자 없다'는 자조를 이끌어 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 자식들 때문에 쓸쓸히 노후를 보낼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러나 남의 집 딸들도 아들들도 처음부터 그들의 부모를 잘 모시고 싶지 않아 하는 괘씸한 자식은 없었을 텐데….

   
이 책의 저자는 가족이 해체되고 핵가족화 돼 가면서 유목민화 해 가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 노인 문제를 '효' 의 관념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자식들은 부양이 필요한 부모를 시설에 맡길 수 없다. 사설 시설은 비용이 너무 비싸고 심리적으로 부모를 버렸다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병이 들고 노후한 노인 부모들 또한 자식들에게 계속적으로 짐이 되고 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으로 힘이 들 것이기 때문에 노인대책은 이제 사회가 나서서 풀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주장이다.

물론 사회적 시스템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야마토마치의 노인들도 복지의 혜택 속에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갈등을 안고 있다. 대개 젊었을 때 가족간에 유대가 깊지 못했던 사람들은 노인이 되어서 가족으로부터 방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아끼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결과이다. 가족간 정서문제야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하더라도 부양해야 할 노인들이 가족의 생활을 담보하지도 않고 또 남에게 폐가 되지 않은 채 온화한 노후를 마련하도록 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지못해 하는 보살핌을 받는 노인이 가장 큰 피해자이므로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효'를 찾아야만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일본의 경우를 들어 우리가 당장 직면한 문제를 바라보았다는 데에 이 책은 공헌한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효도의 논리로만 보고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결국 노인들과 가족들 간의 감정의 피폐는 깊어지고 커다란 사회문제를 양산할 것이라는 진단은 서늘하지만 들어 둘만한 충고였다. 사회 전체가 납득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려면 가족과, 지역 공동체와 정부의 역할 분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제도든 우리들 또한 노인이 될 것이라는 자각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정서적 지원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지금 선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일에 정성을 다 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 야마토마치의 복지 시스템 구축이 의사 세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의사로서의 직분에 사명감을 가졌고 작은 사랑의 씨앗을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한 나무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족을 넘어서서 사회로 흘러간 경우다. 어떤 문제가 문제로만 남는 것은 거기에 핵심이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닥친 고령화 사회의 방향은 노인복지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보는 관점이 아니라 미래의 시간에 우리들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으며 어떻게 대우 받고 싶은 지를 묻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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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살기, 사는 것 처럼 살기
[민들레의 책읽기⑤]「플러그를 뽑는 사람들」
2004년 08월 06일 (금) 00:00:00 민들레 시민/객원기자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은 '플레인'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들을 모아 주제별로 다시 엮은 것이다. 플레인의 기저가 아미수 공동체에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아미쉬 교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대안적 생활 태도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글쓴이들은 '몸을 움직여 먹고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가 말하는 기계문명의 편리함이 사실은 편리함이 아니라 우리를 옭아매는 구속이라고 여긴다.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는 컴퓨터가 오히려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시간을 더 빼앗고, 자동차와 전철의 등장은 통근 거리를 늘려 놓았다. 아파트 융자금 납부의 올가미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를 망각하게 한다. 그러는 동안 가정을 잃은 아버지와 아이들이 생기고 방황하는 존재들이 늘어난다. 자기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기계가 만드는 조직(기계 문명을 비롯하여 학교 같은 조직까지) 속에 갇혀서 기계적 생각에 함몰되어 자기를 잃어버린다.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여가선용이나 정보 습득의 순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소비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플러그를 뽑았다.

사실, 플러그를 뽑는 일을 당장 실천한다면 오늘 저녁 나는 밥도 굶고, 글을 읽을 수도 없으며 가족과 연락 두절 상태가 될 것이다. 이미 기계문명의 혜택을 공기처럼 마시고 사는 우리네 삶은 전자제품을 이용하지 않거나 통신을 이용하지 못하면 바로 무인도에 표류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 우리 삶의 맹점이 있지 않을까.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조차도 점점 기계 문명사회의 전문가 집단에게 일임하는 태도로 삶을 몰아간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텔레비전의 유혹하는 광고와 인터넷의 범람하는 정보에 우리를 빠뜨려 놓은 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광고를 만든 건 기업이고 그 기업들은 소비를 부추겨 이윤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을 위해서 삶의 모델을 가르치려 든다. 큰 평수의 번듯한 집, 큰 차를 부리며 타인 위에 군림하는 삶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분수처럼 내뿜는다.

그러므로 학교까지도 이런 기업들의 사고 체계가 흡수되어 아이들은 좋은 대학이라는 딱지를 받으려고 그들의 반짝이는 시간을 죽인다. 알고 싶어서 하는 공부, 자기 삶에 정말 중요해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어떤 통과를 위해 머리 속에 쑤셔 넣어야하는 지식의 더미를 떠 안고 청소년기를 보낸다. 요즘의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했어도 시험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바보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만들기 위해 교사집단은 아이들의 자율성을 제한한다. 교사조차도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의 논리로 아이들을 대하는 교육의 대리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 이윤추구기업들이 가르쳐 주는 삶의 모델을 잘 따라가는 일로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맹주를 하고 있는 현대의 대중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속담처럼 뛰는 사람은 나는 사람의 급속한 상승을 부러워하며 더욱더 속력을 낸다. 속도는 이 시대의 미덕처럼 보이며 기계의 발전은 기업의 미덕이 되었다. 그러므로 기업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우리를 부추긴다. 빠른 것이 좋은 것이라고.

이 책은 과연 그런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문명과 속도라는 이 시대의 미덕에 아무 생각 없이 편승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글 쓴 이들은 소박한 그들의 삶을 통해 진정한 삶 찾기를 도와 주고 있다.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고립되어 사는 게 아닌가 싶은 의문도 있고 이런 삶이 과연 가능하긴 할까 싶은 의구심이 드는 글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관통하는 생각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삶인가'이다. 그들이 사는 방법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 삶을 진실되게 하는 데 도움이 줄 것이다. 소박한 삶을 원하는 이에게, 천천히 사는 것을 원하는 이에게, 가족과 이웃과의 정을 중요시하는 이에게 이 책은 공감의 장을 넓혀 준다. 여전히 속도 경쟁의 구조에 함몰되어 자신의 삶이 왜 버거웁고 힘든지 그 원인을 잘 몰랐던 이들에게도 삶을 되짚어 보는 계기를 줄 것이라 믿는다.

책을 덮으니 '단순한 삶'의 풍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 것 같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기에 뉴욕을 떠나 시골로 가 살며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던 스코트 니어링 부부의 자서전이나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이란 책과 더불어 이 책은 영혼을 가지런히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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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을 위한 모반,거듭 나기를 위한 혁명
[민들레의 책읽기⑥]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2004년 12월 01일 (수) 00:00:00 민들레 시민기자

   
▲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엄마 아빠가 달라져야 교육이 살아요.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은 교육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삶의 진정성에 대한 말 걸기로 보였다. 말하자면 '내 삶의 혁명'을 다루고 있는 책이었다. 너무나 강건해진 자본주의적 가치가 범람하는 속에서 그의 말은 현실을 너무 관념적으로만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가까운 사례를 들어 차근차근 풀어 나갔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모든 것들은 이상주의적인 권고이면서 가장 현실적인 지적이 되었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시골생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는 스스로의 생각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하자는 격려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주변을 탓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바꾸어라. 조급증을 버리고 결심하라, 진정으로 살림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몸으로 느끼고 자연에서 느껴라, 자연과 가까이 하면서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라. 그의 충고는 거침이 없었으나 따뜻한 위로였다.

우리 아버지는 농사꾼이셨다. 해방 후 사회주의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 때문에 가족 살림이 기울었고, 배를 곯으며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성장기를 보내셨다고 한다. 때문에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큰 반감을 가지고 계셨다. 나이가 들면서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가장이 되자, 결국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된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돈을 벌겠다고 팔을 걷어붙이셨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였고, 그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모델로 삼아 우리 집 경제도 부흥시키려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심히 농사일을 하셨다. 아니 가족 모두가 돈을 잘 벌어 잘 살게 되는 것에 삶의 목표을 두고 매진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밭이 늘어났다. 아버지는 밭을 사들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아버지의 밭은 농토라기보다는 공장과 같았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복합영농을 하던 아버지의 농사 달력은 농산물공판장에 어떤 상품을 얼마에 내놓아야 하는가 등의 계획으로 채워졌다. 우리 밭의 오이와 토마토는 시간에 맞추어 따고 포장해야 하는 공장 제품이었다. 자식들은 집안을 일으켜 세울 기둥이었고, 기둥이 일어서려면 뒷받침 해줄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논리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들이 커 가는 걸 보면서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묶었다.

어느 날 여동생이 집에 왔다가 우리 집 아이를 혼내는 나를 보더니 그 옛날 아버지와 어쩜 그렇게 똑같냐면서 놀라워했다. 해명할 틈도 주지 않고 아이를 몰아세우는, 그리고 자기 분풀이하듯이 말하는 나의 태도를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 아이의 느긋한 성격을 좋은 점이라고 평가하기보다 고쳐야 할 약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에 남은 건 너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살고 있었다. 내 인생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나는 쫓기고 있었다. 너는 내가 밟은 실패의 길을 걷지 말고 내가 일러주는 길로 가라, 그러면 엄마가 겪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책을 많이 읽어라, 글도 많이 써라.

어느 틈에 아이는 나를 두려워했다. 평소에 잘 해 주다가도 언제 어느 때 자기의 실수가 보이면 용납하지 않는 엄마가 두려웠던 거다. 아이는 미안해요 죄송해요 라는 말을 자주 썼다. 나는 또 그 말에 민감해져서 아이의 소심함이 걱정이 되고 앞으로 어떻게 이런 성격으로 살아갈까 한숨이 나왔다. 악순환의 시작점에 와 있었다. 바로 나는 내가 밟은 실패의 길을 내 아들에게 고스란히 안내하고 있던 셈이었다. 아들과 내가 서로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소지를 안게 되었던 것은 지금까지 내 삶의 과정이 나를 안심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서 무엇엔가 쫓기며, 그런 상태를 스스로 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강수돌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내 삶을 돌아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의 삶의 태도를 거부하면서도 그대로 내 몸에 뿌리 내린 성공과 실패에 대한 강박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강박과 불안은 전염성이 강하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한국 사회 전체가 경제적으로 잘살기에 전념하는 동안 각 개인들도 잘 사는 일의 진정함이 무엇인지를 성찰하지 못하고 불안을 생산하는 사회 구조 속에 함몰되었다. 나 자신 또한 그랬다. 지금도 역시 실패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으로 자주 뒤를 돌아다보며 시행착오를 후회하고 미래의 시간을 두려워했다. 나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아들에게 전염되어 소심한 아이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들 실패와 두려움이 없이 삶을 살아 갈 수 있으랴. 실패와 두려움은 자신의 뿌리를 건강하게 할 때 물리칠 수 있다. 튼튼함의 기초는 제대로 잘 살아야 하겠다는 결단을 실천함에 있고 혹여 그것이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는 것이 될지라도 싱싱한 생산을 예정하는 모반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피해 가려 하지 말고 직접 내 몸과 마음으로 겪으면서 내 삶의 뿌리를 더욱더 건강하게 키워 나가야 하겠다. 맑고 튼튼한 정신의 뿌리를 내린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야겠다. 그래서 소박한 그늘을 만들 수 있음에 만족할 줄 아는 나무로 거듭나기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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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민들레의 책읽기⑦] 사춘기의 뇌, 위험과 희망의 파도타기
2005년 01월 03일 (월) 00:00:00 민들레 시민기자

   
▲ 십대들을 이해하는 새로운 모색, 뇌과학은 청소년 이해를 위한 획기적인 발견이 되고 있다. 바버라 스트로치 지음.
도대체 나는 어떤 혼령에 씌웠던 것일까? 지금도 20년 전 여름의 순간적인 결정과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결행했던 일탈을 이해할 수 없다. 숱한 이유를 대면서 그 시간의 나를 이해해 보려고 했었다. 어떤 때는 부모님과의 무언의 갈등을, 어떤 때는 서울로 가고 싶었던 유치한 동경을, 어떤 때는 자기가 했던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나의 어설픈 의리 때문이었다고 해 보아도, 그때 아무도 모르게 잠적한다는 말에 유혹된 나의 정신과 기어코 표를 끊어 부산으로 향하는 카페리를 탔던 나의 몸은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덩어리로 남았다. 그것이 뭔가 저지르고 싶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욕망이었다면 그 욕망은 이후 내 생의 발목을 잡아 옴싹달싹 못하게 얽어내는 역할을 충분히 했고 일단 저지른 일은 깨진 그릇의 넘쳐 나는 물처럼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시간의 수레를 타 버린 후였다. 잠적한다는 문학적 용어에 매료되는 그 일은 사실 어떤 갈망이었다기보다는 폭풍과도 같은 충동이었다. 그리고 이후 나는 내내 그때의 그 시간을 후회 속에 보냈다. 조절할 수도 있었던 충동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로 나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해?” 힘없이 굽은 아들의 어깨가 괜히 마음에 걸리는 걸 눈치 챈 남편의 질문이다. 나, 의욕 없음, 나, 말하기 싫음, 나, 기분 나쁨, 등등의 메시지로 읽히는 아들의 굽은 어깨와 흐느적거림은 종종 내 속을 긁어 놓는다. 충분히 내 아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아들 없이 어떤 무엇도 중요한 게 없을 것 같이 굴다가도 아들에게 속사포처럼 화풀이를 해 댈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좋은 엄마 되기 같은 것은 나 모른다. 정말 속상해 죽겠다. 이렇게 속상해 가면서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면 나 싫어!!! 나 싫다구!!! 하고 악을 쓰고 싶어진다. 이럴 때 거의 나는 아들에게는 좋은 엄마가 되고자 하는 의지 따위는 벗어던진 야생의 짐승 모습을 한 공포의 엄마가 되기 일쑤다. 그 동안 쌓아두었던 아들에 대한 불만이 범람해서 나 먼저 그 격랑에 휘몰리다 보면 내 몸이 병이 날 것 같다. 다음 날 친구들이랑 모여 아이들 교육에 대해 이야기 할라치면 또 침이 마르게 자랑을 하게 될 이 아들이 가끔 내 마음을 긁어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란 사람이 공포와 위협의 존재가 되도록 하게 하는 데는 뭔가가 있다. 내 문제일까? 아니면 아들의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아들과 내가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인가, 또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도 아닌 문제인가.

   
▲ 아이들, 만 세 살은 태아 때부터 발달한 뇌가 가장 발달하는 시기로 알려졌다.
나의 젊은 시절의 충동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고 지금 아들이 보내고 있는 시기에 대한 이해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책의 저자는 사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키우기 전까지는 청소년기에 대해서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뇌의 문제라면 더욱 그랬다. 자기가 뇌를 전공으로 연구하는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기의 뇌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은 데는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다.
대개 우리들은 태아 때의 뇌에 대해 알고 있고 태아 때부터 성장을 거듭하던 뇌는 만 세 살 즈음에 폭발적으로 발달한 후에 만 8살 전후로 거의 완성된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이 스스로 아이를 키워보면서 사춘기를 전후해 자신의 아이들이 겪고 있는 변화가 혹시는 뇌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MRI와 같은 첨단 의학 기계가 도입되고 그 안전성이 증명되면서 청소년의 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90년대 중반부터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제 더 이상 뇌가 만 8살을 전후해서 성장이 멈춘다는 사실을 믿지 않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동물실험은 물론 청소년을 대상으로 직접 연구한 결과에서도 이제 청소년기의 뇌가 이상하리만치 성장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청소년기의 뇌에 대한 연구 보고서 같은 책이면서 아이들을 잘 키운 경험 많은 선배가 조곤조곤 말해주는 것처럼 십대 청소년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우리가 겪고 있는 아이들과의 경험과 당황이 미국이라고 해서 또는 유럽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또한 이 책을 읽다 보면 뇌 과학, 그 중에서도 청소년의 뇌에 대한 연구가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십대 청소년들의 보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십대들의 행동과 그 행동을 유발시키는 뇌에 대한 연구는 결국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당황해 하는 어른들의 문제를 연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 세상에 나온 여러 가지의 이론으로 아이들을 이해하고 싶어 하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던 셈이다. 과학자이면서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저자의 경험 때문인지 그녀의 이야기 방식은 친근하다. 과학자들의 연구를 파헤치면서 지금 바로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문제처럼 십대들의 문제를 꺼내어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 책을 보다 더 수월하게 읽게 한다.

요즘 십대들의 행동은 우려할만한 수준으로 위험도가 높아졌다. 위험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 이 책에서 알려주는 대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그들의 뇌 탓이겠거니 하며 그들을 여유롭게 이해한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행동을 제지하고 바르게 인도해야 하는 어른들로서는 또 다른 고민이 쌓여가게 된다. 보다 더 유혹이 많아지는 사회와 보다 더 경쟁이 심해지는 사회에서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고 경쟁력도 잘 갖춘 아이로 키워야 하는 어른들은 자식 교육에 관한한 무거운 숙제가 점점 더 무겁고 힘에 부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뇌가 발달하면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일은 희망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통과의례다. 저자는 그러나 낙관적인 전망을 한다. 앞으로 뇌과학의 발달이 교육제도 개선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친 가치관을 조정해 주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아이들은 위험과 희망의 아슬아슬함 줄타기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모들이 제대로 받아들이기를 권고한다. 출렁이는 물결 속에 성장을 향한 변화의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한 기대치를 조정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 자신의 행동 또한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청소년기라는 안개를 건강하게 잘 지나가게 하기 위해 부모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등과 관련해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한 번에 한 번씩, 천천히 조용하게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방식, 아이들에게나 우리들 자신에게나 좀 더 관대해질 필요를 저자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회가 대단히 압력이 심한 사회라는 걸 부모들이 인정하고 그들이 방황하고 고민할 시간도 허용해 주어야 한다는 게 거듭되는 저자의 생각이다.

아이들에 대한 뇌과학이 현재의 교육제도라든지 사회 전체의 구조를 바꾸기는 요원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을 제대로 잘 키우는 것이 내가 아이에게 가진 진정한 희망인 이상 나 먼저 아이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아이에 대해 거는 기대가 무엇인지를 점검할 때다. 그러니 청소년기의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같이 폭발적으로 성숙하여야 할 시간이 마련된 셈이다. 그러니 이제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할 때가 되었다. 성장의 혼란 속에서 낙관적인 의지를 어떻게 잘 꾸려나가며 살아가는지 그 과정에서 가꾸는 노력과 실천에 따라 나와 아들은 의미 있는 결실을 얻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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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빛나는 도시와 소멸하는 삶
[민들레의 책읽기(8)] '한국의 아파트 연구'를 읽고
2005년 08월 08일 (월) 00:00:00 민들레 시민기자

   
▲ 한국의 아파트는 도시의 현대화를 이끌었다는 저자의 주장이 담긴 책.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한국의 아파트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로 하나의 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도시에 살게 되면서 집장만이라면 아파트를 사고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고 탓인지 도시의 아파트나 아파트 단지 라는 것이 우리 삶에 들어온 '이상한 무엇'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소설에서 집으로서의 아파트가 주는 느낌을 읽은 적이 있지만 작가의 시각에 공감하고 말뿐이었는데, 아파트가 주제가 되어 책으로 나왔다니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 책을 쓴 프랑스 지리학자인 발레리 줄레조 교수는 프랑스의 아파트 단지인 '씨떼'가 프랑스인들에게 외면을 받는 데 비해 한국 사람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에 궁금증을 가졌다.

한국에서의 5년 간의 연구 결과 만들어진 이 책은 방대한 자료 조사와 각종 보고서를 검토하였고, 주민들과 관리소 직원까지 방문하여 인터뷰하는 등 사회학적이고 지리학적인 연구 방법을 따라 만들어졌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잘 구성된 논문을 읽는 것처럼 자료그림과 통계표 등에 대한 설명도 꼼꼼하다. 외국인의 한국 연구가 이처럼 객관적 자료에 의해 면밀히 검토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겐 하나의 소득이다. 우리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 너희를 봐. 이런 모습이거든'하고 말을 건네며 다가오는 거울과 같다.

연구의 시작은 프랑스와 한국에서의 아파트가 사람들에게 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서울, 거대한 촌락, 빛나는 도시'라고 붙인 프랑스판 책의 제목은 그녀의 아파트 연구가 특히 서울의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그녀는 한국의 아파트가 아주 독특한 성격을 갖고 한국 도시의 현대화를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촌락이 빛나는 도시가 되기까지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현대화라는 말에 현기증이 날 때가 있다. 높은 빌딩에서 아래를 볼 때의 고공공포처럼 현대화된 건물과 상품의 빠른 유통과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넓고 빠른 도로의 확장을 볼 때면 곧잘 이전에 무엇이 어떻게 있었는지를 잊는다. 점점 타인들에 의해 자기 삶의 공간이 함부로 변해 버리는 세상으로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된다.

사회가 현대화 되면 될수록 자기 삶이 남의 손에서 양육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너무 거친 강박일까. 요즘 세상에 스스로 집을 지어 사는 사람이 거의 없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살 집을 짓는다는 행위 자체가 일반적인 삶의 모습은 아니다. 입는 것, 먹는 것의 대부분은 남의 손에 의해 생산된 것들이다. 가공의 정도에서 보면 가장 그 의존도가 낮아 보이는 먹는 일도 음식의 재료를 시장에서 사 온 후에야 음식 만들기의 작업을 하게 된다. 산업화 된 세상으로 갈수록 간편성이 늘어나고 자기 몸 대신 해 주는 의존의 마력은 커진다.

그렇지만 간편의 댓가는 반드시 있어서 먹을 음식. 입을 옷, 자야 할 공간을 제공 받기 위해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 재화의 교환에 필요한 돈을 벌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인 세상, 그만큼 산업화의 수준이 고도화 되었다는 것이며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꾸어졌다는 말이다. 세상 변하는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주저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스멀거리는 두통같다.

   
▲ 이 땅의 흙과 돌과 나무로 지은 집이건만 점점 외면받고 있는 제주의 초가집.
이 책을 읽으며 줄곧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이 생각났다. 제주도의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이었다. 그런 집이라면 집 짓는 사람 옆에서 거들어가며 배우고 난 후 한 평의 오두막 하나쯤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유행하는 웰빙 주택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몸 누일 곳은 내가 만들어 본다는 생의 즐거움 때문에 언젠가는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을 짓겠노라 꿈으로 삼은 지 오래다.


   
▲ 빛나는 도시 서울의 그늘, 판자집.
서울에도 이렇게 스스로 몸 누일 누락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 후의 피난민이 그랬고, 60-70년대에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도시외곽에 얼기설기 지은 집으로 서울살이의 처음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집은 그저 가족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그러나 판자집으로 불리는 이 집들은 도시가 커지고 서울이 세계의 도시와 비교되던 올림픽이 열릴 때 대부분 모습을 감추었다. 잘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나라의 정책을 만들었다. 힘없고 밑천이 얇았던 사람들은 판자집의 기둥이 권력의 불도저에 의해 부서지듯 삶의 기반을 어이없이 내주어야 했다.


   
▲ 한국의 아파트는 단지를 형성하며 원래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을 단지 밖으로 밀어냈다.


아파트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에 서울의 와우 아파트 붕괴 때문에라도 아파트에 사는 것을 그리 탐탁해 하지 않았다.

그래서 70년대 초만 해도 집의 개념은 단독주택과 동일했다. 그러나 좁은 땅덩어리인 서울에 사람이 밀려오면 밀려올수록 지표면을 경제적으로 이용한다는 아파트 건설 논리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정부는 인구정책과 더불어 주택정책에도 경제논리를 펴들었다. 어느 사이 아파트가 투자의 대상으로 안성맞춤이 되더니 수많은 경제개발예정지구들이 생겨났고 그곳의 땅값이 오르기 시작했으며 자연히 투기의 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경제개발 예정지구 또는 재개발지구에 살던 사람들이 아파트라는 황금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높은 분양가 이외에도 계속되는 중도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동네를 새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그들의 동네 위에 우뚝 선 아파트 단지에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아파트는 돈 있는 사람만이 구입할 수 있고 살 수도 있는 곳으로 바꾸어졌다.

한국의 서울, 몇 개의 대도시에서 아파트는 사람들의 경제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 갔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 사는지, 몇 평 아파트에 사는지, 어느 회사가 만든 아파트에 사는지만 알아도 그 사람의 경제상황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된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아파트를 더 선호하고 집장만의 꿈은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데서 흐믓함이 커졌다. 18평 아파트 보다는 31평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보다 더 경제적 우위에 있고 전세로 사는 사람보다는 자기 소유의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안정된 사람으로 믿어졌다. 저축이 늘어갈 때마다 조금 더 큰 아파트로 옮기고 새 아파트에는 신형의 가전제품으로 안을 채워 나가는 즐거움은 대한민국 여성들의 공통분모격인 행복이었다.

   
▲ 다가오는 31일 발표될 정부의 부동산종합대책이 지역 시장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외쳤다. '대한민국에서 집 없는 사람 없게 해 줄게. 모두 내 집 장만 해 줄게'. 정부는 약속처럼 아파트를 건설하려는 기업과 대한주택공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바람에 건설회사는 신나게 아파트와 도로를 만들었고, 그 건설회사의 형제회사들은 아파트의 내부를 맡아 꾸며주고 집집마다 자동차를 보유할 수 있는 선진국 시스템을 구축했다. 새 아파트에 맞는 새 가전제품과 새 가구와 새 자동차는 맞춤세트 같아 보였다. 사람들은 경쟁하듯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려 애썼고 그럴수록 재벌들의 빌딩도 커져갔다.

아파트가 돈이 되니까 사 두려는 사람들이 몰리고, 그 수요가 있으니 재벌들도 아파트 짓기에 여념이 없는 이 구조를 누가 말릴 것인가. 그러나 정부는 재벌과 주택공사의 도움으로 이 나라 국민들에게 집없는 설움을 없애 주었을까. 이 책의 저자가 한 마디 한다. '한국 사람들은 새로운 것, 새 것이라는 근대화 이미지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초기와 달리 요즘은 아파트도 브랜드화 되어간다. 자동차와 옷의 브랜드. 음식의 브랜드가 그렇듯이 주택의 브랜드도 욕망을 부채질 할 것이다. 재벌들은 광고를 만들고 정치권력에 손을 뻗어 우리의 욕망을 먹기 좋은 요리로 만들어 갈 것이다. 산업사회의 기업은 우리 주변을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야 하는 게 그들의 생존적 운명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들의 먹이라는 표현은 지나치지만 진실이다.

우리 집은 15년 전에 지은 3층 짜리 연립주택이다. 어떤 이는 이 집 때문에 손해 봤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사람의 이야기인 즉슨 처음 이 집을 마련하려고 은행 융자를 받았고 그것을 갚는 세월동안 다른 아파트의 값은 계속 올랐는데 이 연립주택은 거의 가격 변동이 없어 부동산 투자라는 측면에서 실패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연립주택을 탐탁치않아 하는 사람들은 유명 건설회사의 새 아파트를 선호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같은 평수의 비슷한 구조를 가진 새 아파트들은 이 집과 거의 2-3배의 가격 차이가 난다. 집이 만들어진 햇수와 새로운 실내인테리어의 사소한 차이가 두 배 세 배의 가격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유명회사의 신형 아파트가 그렇게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한 연립주택에 사는 사람은 2-3배 가난한 사람들일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2-3배의 높은 가격만큼 집을 위해 저축도 더 많이 해야 하고 대출금도 더 물어야 하니 그 이름값하는 아파트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고의 차이 때문에 나는 경제에 어두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지인에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 했더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으로 여겼다. 부자들은 집을 살 집 하나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수십여 채의 아파트를 가진 사람들도 있는데 나의 사고방식은 영영 부자로 살기는 틀린 위인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짓고자 하는 흙과 나무와 돌의 집은 이 세상에 꺼내 보이기엔 너무나 관념적인 사치인가 싶어졌다. 산업사회의 가치인 돈 키우는 집과도 거리가 멀고, 행정기관의 증명서나 받을 수 있으려나, 어쩌면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지 맘대로 지었다고 언제라도 행정기관의 불도저에 기둥이 풀썩 꺽일지도 모르겠다.

   
▲ 뉴욕시에서 가장 좋은 집이라 일컬어지는 이 저택은 안에 수영장과 골프장까지 갖추었다. 이런 집들은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라고 주문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려던 것은 비교와 증거를 통해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의 아파트에 관한 객관적 사실을 더 잘 이해하고 한국에서의 아파트는 프랑스의 아파트와 달리 도시의 현대화에 기여했다는 점, 아파트가 슬럼화 되지 않은 것은 한국의 주택정책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객관적인 증거 자료를 보는 우리는 그녀가 슬쩍 언급했을 뿐이지만 뼈아픈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집을 지나치게 재산 가치로 여기며 투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그러다 보니 정부의 경제와 주택정책이라는 게 재벌과 부자들을 위한 것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잘 살아 보자는 60-70년대의 혼란기를 거쳐 잘 살고 있다는 지금까지도 이 나라의 정책은 재벌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새겨들을 점이다.

반 세기 전만 해도 우리 주위에 없던 이 아파트라는 '이상한 물건'이 우리 삶으로 들어온 이후 얼마나 우리의 생각과 생활습관을 바꾸어 버렸으며, 건강과 인간관계까지 서서히 바꾸어 버리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집 안을 가꾸어 나가는 일과 집의 규모만을 키워 나가는 일은 분명 다른 출발선에 있다.

돈 되는 집이라는 반짝이는 욕망이 얼마나 우리 삶을 얽어매고 있는지를 돌아볼 일이다. 내가 터를 닦고 살고 있는 이 집 이전에 어떤 이의 삶이 그곳에 있었을지를 상상하고 집이란 도대체 자기 삶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질문은 '생각의 집'을 만드는 데 소중한 돌과 나무와 흙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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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민들레의 책읽기] 종전 조서 800자로 전후 일본 다시 읽기
2005년 08월 14일 (일) 00:00:00 민들레 시민기자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종전 조서’ 800자로 전후 일본 다시 읽기 / 고모리 요이치 지음/뿌리와 이파리 출판사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의 잡음 속에서 ‘대동아전쟁 종결에 관한 조서’를 읽는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4분 42초. 전쟁은 그렇게 끝났지만. “참기 어려움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 ….” 라는 구절 외에 전문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 ‘종전 조서’에는 ‘패전’도 ‘전쟁책임’도, 중국과 소련, 식민지 조선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오로지 ‘천황제’, ‘국체수호’와 전쟁책임 전가로 일관한 천황의 항복방송, 그것은 자위대의 해외 파병과 ‘전쟁을 하는 보통국갗 일본으로 향하는 전후 일본의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 지은이의 말

   


일본의 우경화를 심각하게 우려해 온 지은이 고모리 요이치(小森陽)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역사교과서에서 기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에도 시대까지는 천황의 역할이 무턱대고 반복, 강조되다가 메이지 이후가 되면 천황에 대한 언급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일본의 천황이 ‘상징천황’인 것에 쉽게 동의 한다. 그러나 왜 ‘상징천황’인 것인지 또는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상징천황’은 역사적 사건과 함께 등장한 현대 일본어이며 천황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1945년 8월 15일 ‘종전 조서’ 낭독을 ‘성단’의 조치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천황’은 권력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천황이 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정치, 경제, 군사 모든 면에서 대일본제국을 이끌었던 인물에서 한낱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의 제사장으로 모습을 변화시켜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일본 오키나와 이토만. 오키나와 본섬의 남부 마부니 언덕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최후 격전지였다
이 책의 지은이는 패전도 침략 전쟁의 책임도 언급하지 않고 미점령군의 대일정책과 모순되지 않는 천황의 ‘옥음방송’과 ‘인간선언’을 연구하면서 종전 이후 일본 사회가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담론에 의해 거짓과 진실이 혼미하게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지은이는 일본이 진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패전 후 일본인들에게 내재되어 버린 거짓의 실체를 밝혀야 하며, 천황과 측근들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하였는지를 국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지은이는 역사의 거울이 왜곡되지 않았을 때라야 현재와 미래의 일본이 거듭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현재로부터 과거를 다시 파악함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역사관이다. 그래서 돋보기를 들고 왜곡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 노력이 바로 이 책,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종전조서 800자로 전후 일본 다시 읽기' 이다.


‘종전조서’ 전문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黃祖黃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 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는 미치는 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었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信義)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어명(御名) 어새(御璽)

   
▲ 그는 점령지 일본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필요로서 전쟁범죄자 히로히토를 면책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인천상륙작전의 공으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거래꾼이기도 했던 맥아더
위의 종전조서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적 열망으로 벌인 전쟁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41년 이후의 미․영 2 개국과의 전쟁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종전 조서에는 패전의식이 없으며 미국과 영국에 대한 태평양 전쟁을 ‘자존·자위’의 전쟁이라고 의미부여하여 침략전쟁이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한다.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해 온 일련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꾸며졌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이 중국에 대해 벌인 전쟁으로 발발하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이 종전조서에 쓰여진 언어는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국체 수호를 위한 천황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였다. 만주 문제를 모두 소거해 버린 이 종전조서는 히로히토가 즉위한 이래 전쟁에 대한 관여, 대원수로서 내렸던 결단을 없었던 것으로 하기 위한 정보조작이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며 가능했던 것일까.


   
거기엔 미일합작의 전쟁책임회피극이 있었다. 미국은 히로히토를 이용하고 히로히토는 미국 특히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를 등에 업고 전범재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히로히토의 명령대로 700만 군대가 무장해제 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의 점령정책 실시에서도 천황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만약 천황을 ‘전쟁범죄’인으로 소추하면 국민의 강한 반발이 생기고 폭동이 일어나, 미국으로서는 더욱 많은 파견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점령도 장기화된다는, 점령비용론을 들어 히로히토의 면책을 미국에게 협박하기도 하였다. 미국내의 여론은 물론 다른 연합국의 여론도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하였지만 천황의 지위 문제는 맥아더가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일이다. 맥아더는 일본에 신헌법을 만들어 극동위원회를 구성하는 나라로부터 히로히토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신헌법은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이름으로 ‘전쟁포기’와 ‘전력을 갖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음으로써 제9조의 틀을 만들었고 미국과 일본이 담합한 제휴적 합작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당시까지 단순한 민(民)이었던, 사족(士族)이외의 일반 남성은 근대징병제를 통해 육해군 어딘가의 병사가 됨으로써 신(臣)의 위치를 획득하고 대원수 천황과 군신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병사가 됨으로써 천황의 신(臣)이 된 자는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천황에게 바친다. 그 죽음은 국가를 위한 죽음으로 위치지어진다. 그 전사자의 영혼은 현인신인 천황의 참배를 받음으로써 ‘국가의 신령(神靈)’이 된다. 청일 전쟁 때 전국화 된 이 야스쿠니의 논리는 러일전쟁 때 발생한 방대한 전사자에 의해 대중화 되었으며,이 영령은 천자에게 위령(慰靈)되어 ‘호국의 신’이 된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 병사의 죽음은 러일 전쟁 때의 10 배가 넘었다. 히로히토는 자칫 자국민으로부터도 전쟁의 책임자로서 전 국민을 고통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으로 자리가 바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천황의 신(臣)을 국가의 신령(神靈)으로 만듦으로써 천황의 신(臣)은 죽음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신도에 의해 정신세계가 지배되고 있던 국민들에게 천황은 여전히 현인신이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자들의 죽음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히로히토가 천황으로서 살아남는 것, 근대 천황교의 제사로서 잠재적인 제사대권보유자로서 살아남는 것이 필요했다. 히로히토와 그 측근들은 종전 후 오끼나와를 제외한 일본 국토의 순행을 통해 천황이 국체수호자임을 알리는 이벤트를 열었다. 천황의 안위를 위해 미국에게는 협박을, 자국민에게는 국가 이벤트를 행했던 것이다.

전쟁포기 헌법을 통해 천황의 전쟁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던 히로히토는 제사대권자로서 천황의 ‘이름 아래서 죽은 자국 병사들에 대한 책임’만을 짐으로써 국내적인 지지를 얻어내고, 역으로 ‘2천만 아시아대륙의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은 군부지도자에게 전가하고 히로히토 자신은 도쿄재판의 소추를 면함으로써 천황으로서의 지위를 보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의 ‘상징천황’은 만들어졌고 새로운 전통이 되어 그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있을 수 없지만 쇼와 천황 히로히토가 소련이 참전하기 전, 즉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기 전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면, 북에서는 소련이, 남에서는 미국에 의한 일본군의 무장해제의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거기서 발생된 38선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그는 한반도의 분단점령에서 분단국가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대일본제국과 메이지·다이쇼·쇼와 라는 3대 천황의 전쟁 책임이자 전후 책임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기억해 두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천황과 그 측근들이 포츠담 선언을 재빠르게 수용했다면 자국민의 원폭 피해도 없었을 것이고, 본토를 지키기 위해 총알받이 노릇을 한 오끼나와 사람들의 저참한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 전쟁 때마다 국민에게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 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을 만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천황에 대한 충성 여부에 두었다. 천황을 위한 죽음이 침략전쟁에서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신화의식을 조작한 야스쿠니신사를 탄생시켰다.
만약 패전 후에 신헌법 하의 새로운 국민들이 전쟁 당시에 피해 입은 식민지 백성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로서의 그/그녀들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면 식민지 지배의 가해자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국민 스스로의 판단으로 히로히토를 심판하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비추어 줄 거울을 없애 버렸다. 자신의 추악한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무의식의 발동인양 일본 국민들은 오끼나와, 한반도, 중국, 동남 아시아, 남양군도를 의식의 틀에서 제거해 버렸다. 지난 밤에 한 일을 알지 못한다는 몽유병환자처럼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잊고 미국의 원폭에 의한 피해자였다는 것만을 거듭 기억했다.


일본인들은 1945년 8월 15일을 종전이라고 표현한다. 전쟁에서 패하였다는 패전이라는 표현을 삼가는 이면에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성단을 내렸다는 히로히토의 언어적 수사를 모방하는 혐의가 짙어 보인다. 자기들보다 국력이 더 센 연합국의 '잔학한 폭탄' 때문에 할 수 없이 전쟁을 끝내서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야 했다는 논리를 종전 이라는 언어로 내면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평화 공원이 세워지고 평화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전쟁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미국 비행기의 무참한 폭격과 자국민들의 죽음, 가공할 원자폭탄의 위력에 멸망이 되다시피한 일본을 보고 애도한다. 그곳의 현장교육에서 아이들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전쟁은 가족이 죽고 친구가 다치고 거주할 집을 잃고 살아갈 방도를 모두 놓치는 것이라고 배운다. 전쟁의 무서움에 대해 배우는 아이들은 전쟁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나 거기까지다. 왜 그 전쟁이 일어났으며 왜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되었는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일본 자국이 그렇게 처참한 폭력으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멸살시켰으며 죽음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원인이었다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히로시마에서는 단지 군사 강대국 미국이라는 적국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에게 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는 논리는 아이들에게 우리도 힘을 키워야겠다는 것을 내면화시킨다. 그들의 평화교육은 자국의 힘을 키워야한다는 보수당의 논리로 다시 귀결된다. 전력(戰力)을 갖지 않겠다고 명시했던 신헌법은 그 후 자꾸 의미해석을 달리하며 1954년에는 자위대와 방위청이 창설되었다. 평화와 안전을 증진하는 ‘군비’의 보유가 용인되고 ‘자국의 방위를 위한’ 군비가 점증해 가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폭력국가 미국을 거울 삼아 제국 일본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00년 아미티지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에서 영국이 해 온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아시아에서는 일본에게 맡기는 방향을 명확히 내세우며, 미일 안보 체제를 강화하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일본 정부는 ‘무력공격사태’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고, 미일 안보조약에 근거해 일본의 자위대가 전면적인 후방지원을 담당할 것을 결정했다. 2001년에는 아프카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공격에도 자위대는 미군에 연료를 보급해 왔다. 2002년의 이지스함은 그런 맥락에서 파견된 것이다.

그러나 1945년 미국의 공격을 받았던 오끼나와 주민의 증언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말하길 “일본군대나 군사시설이 없었던 마을은 오히려 미국의 공격을 덜 받았지요. 오히려 아무 것도 미국의 공격에 대항할 게 없었던 마을은 무사했어요. 사람들도 덜 죽었고.” 안보를 위해 군대를 키우고 전력(戰力)을 증강시키는 것이 결국 국민의 안보를 위한 일이었던가. 단지 일본에만 해당되는 질문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역사, 제대로 기능하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볼 수 없는 국가의 운명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엔 권력을 잡은 몇 사람의 안위를 위해 날조와 왜곡이 진행되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국민은 없었다. 당대의 권력가들은 언제까지 베일 속의 진실이 숨겨질 것으로 여겼을까.
종전을 둘러싼 일본의 정치와 권력에 대한 책이었건만 나 개인의 역사에 관한 말하기로 읽혀졌던 것은 개인의 역사를 반성하게 하고 새롭게 거듭나도록 비추어 줄 거울은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역사를 만들었던 이 고장의 역사,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영혼 맑은 거울이 필요하다. 어찌 이 책의 주장이 일본이라는 나라 하나에만 해당되는 것일 수 있을 건가. 이 책의 저자가 역사적 진실을 찾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반전 운동과 시민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개인, 자기 고장과 나라의 튼실한 미래를 희망하는 존재들은 거듭 돌아볼 일이다. 자기와의 직면을 통해 건강한 반성을 만들어 내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인가 한다. 해방은 거듭남에서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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