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민족지연구 쪽글(4강)-그들의 부족에서 우리 부족을 만나다

자몽미소 2009. 9. 22. 09:38

민족지연구

(교재: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그들의 부족에서 우리 부족을 만나다

 

2009.9.22. 화


1.야노마모족과 병역필한 한국 남자


아들의 친구들이 하나 둘 군대에 간다. 아들도 신체검사 신청을 했다는 것으로 봐서 곧 군인이 될 모양이다. 그맘때쯤의 내 남자 동창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군대에 갔었다.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될 때, 여자 친구와 잘 안 될 때도 보다 더 일찍 군대에 가는 것을 선호했다. 부모들이 군대에 빨리 가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어서 군대에 다녀와 사람이 되라’고, 아들의 등을 밀어 군대로 보냈다.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고 믿는 한국사회에서 병역미필자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야 비로소 사람대접을 받기에, 병역 기피자는 온 국민의 질시의 대상이 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감옥에 갇혀야 하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가 보이는 정치인은 상당한 곤란을 겪는다.


내게 있어 군대는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하는 장소이고,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싶지 않지만 방법이 없다. 아들의 어깨를 빼거나 손가락을 잘라 버릴 용기가 없기도 하고, 남들 하는 것은 함께 해야 안심하는 아들의 성격이 엄마인 내가 가지 말란다고 해서 안 갈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아예 군대가 없다면 국가가 안 될까 생각해 보지만, 부강한 나라와 부강한 군대가 함께 가는 전 세계적 추세에서 나의 이런 생각은 지나친 이상주의인 것 같다. 

어떤 시골 마을에서 버스를 탄 할머니가 ‘여기 사람 하나도 없네!’ 해서 보니까 버스 안에 군인만 있더라는 말처럼, 군인은 사람 아닌 무엇이 되기도 한다. 사람 아닌 군인들은 2년에서 3년 동안 사람 죽이는 물건을 만지는 방법을 교육받고, 전쟁에 대비하여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연습한다. 적지로 들어가서 적을 섬멸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선을 튼튼히 하는 것을 연습한다. 실제로 공격해야 할 일이나, 공격받는 일이 터지면 연습했던 대로 해서 이쪽의 피해는 적고, 상대쪽의 피해는 크게 해야 한다. 이때 군인의 목숨은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국가라는 부족에게 내놓은 무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군인들은 이웃 부족인 북한이 언제 남침해 올지 모르므로 대비한다고 한다. 싸움을 하는 전사로서 인생의 일정한 기간을 국가에 몸을 맡긴다.

일생을 자기 부족을 위해 몸을 바져야 하는 종족이 있다. 나폴레옹 샤농은 싸움을 잘 하는 야모마모 족을 소개했는데, 어떤 이들은 그들이 싸움을 잘하기에 ‘잔인한 종족’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지도자가 되려면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어야 하고, 추종자들이 자기를 따르도록 하려면 보다 더 자신의 난폭함이 과시되어야 한다. 심지어 자기 부인들을 잔인하게 구타하여 난폭함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웃 부족과의 끊임없는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야노마모는 항상 자신의 몸을 싸움을 위한 몸으로 준비해 두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 이웃 부족으로부터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들은 이렇게 폭력적일까? 나폴레옹 샤농은 군사적인 성공과 생식활동의 성공 간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였다(나폴레옹 샤농, 2003; P363-365).


“우노카이”, 즉 살인을 한 적이 있는 남자는 같은 나이의 “우노카이” 가 아닌 남자보다 자녀를 더 많이 두었다. 평균적으로는 아내는 2.5 배 이상, 자녀는 3 배 이상 두고 있었다. “우노카이”들은 사회적으로 보상 받으며 다른 남자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아내를 더 가질 기회가 많고 그 아내들과의 사이에서 평균보다 더 많은 자녀를 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화적․역사적 환경에서 문화적 성공은 생물학적 성공을 가져온다.

만일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 지도자가 되는 일(문화적 성공)이 항상 결혼과 생식 활동의 성공을 보장한다면 더 많은 남자들이 성직자나 주술사와 같은 종교직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웃이 이런 저런 것을 탐내고 있고 게다가 한쪽 뺨을 맞고 다른 쪽 뺨을 내밀 때 가진 것을 몽땅 빼앗아가려는 경우라면 이타적인 종교 지도자나 주술사가 되는 것은 그다지 훌륭한 전략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성직자보다 군인이 더 많은 것이다.

전사나 군인으로 불리는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분․ 부․ 권력 등 각자가 속한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보상으로 풍부하게 받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 뽑는다. 그 외 훈장과 명예를 준다. 야노마모족 사회에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없지만 그런 남자들은 더 많은 아내들과 아이들을 얻는다. 그들이나 우리나 생리면에서는 똑같다. 다만 문화가 다른 것이다. 그렇게 양쪽에 모두 각각 문화적 환경에 알맞은 선물을 전사들에게 상으로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군대 또한 야노마모족 사회의 보상이 있다. 여성계에서는 반발했지만 군대를 다녀온 남자에게 주는 가산점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군대는 보상 보다는 변별과 배제의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군대미필자는 신체검사라는 통과선을 지나지 못한 사람으로서 몸에 무슨 병이 있거나 키가 작았거나 어떤 기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일정한 학력이 되지 못했을 때도 군대에 가지 못하므로 결혼 적령기의 여자들이 남편감을 고를 때 군대미필자는  학력이 부족하거나 신체적으로 모자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게 된다. 또한  병역의무기간에 있는 남자들은 군대에 다녀와서 모두 받는 가산점을 못 받았든가 군대의 조직이 만들어 주는 선후배 관계를 못 만들었을 때 이것은 사회가 당연히 주고 있는 선물을 받지 못하여 손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므로, 모두에게 주는 선물은 당연히 받아야한다고 여겨 기꺼이 군대로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의 보상의 가치가 변하고 있음에 따라 군대의 보상이 보상기능을 충분히 못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대에 가서 얻는 보상이 가지 않고 얻는 보상 보다 적을 때 병역기피를 하게 된다. 대개는 사회가 주는 보상보다 개인의 능력이 우선하다고 생각하거나 부모의 보조적인 힘이 우세할 때 병역기피를 한다. 근래 문제 되고 있는 어깨탈골환자 만들기 같은 것은 조직적인 병역기피현상이다. 이를 두고 사회는 아우성을 한다. 그 이면에는 나만 고생할 수 없다든가, 나보다 환경 좋은 사람이 누리는 혜택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들의 비판은 국가적 의무와 국민적 도리라는 도덕으로 무장해 있지만, 내면은 보상의 불평등에 대한 불평이다. 이제 군대는 한국 사회에서 보상보다는 배제되지 않으려는 것 때문에 치루는 일쯤으로 되고 있다. 군대를 나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은 이미 구시대의 어머니들이나 하던 말이고, 현대의 어머니들은 될 수만 있으면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말았으면 싶다. 군대에서 얻는 것 보다는 잃는 시간이 아깝고, 군대의 조직 문화에서 다칠 수도 있을 인간의 성정을 염려한다. 군대 제대 후에 얻는 가산점이라면, 군대에 가지 않고  그 시간동안 학업적 능력과 일터에서의 경력을 쌓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군대는 분단된 국가 현실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압도적인 분위기에서 살다 보니 안 따를 수 없는, 그래서 적극적인 군인이기 보다는 소극적 군인으로서, 국방부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군대 가기 의무를 해치우는 것이다.


2.부시맨과 제주말


“이그라진 책 허지 말아! ” 는 경고성 발언이다.

“뺄라지다” 라는 말에는 경계하는 느낌이 가득하다.


제주말, “이그라지다”는 잘나고 똑똑한 것을 이른다. 어떤 사람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밀어 나가려고 할 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를 꾸짖어 “이그라진 책 하지 말라” 한다. 대개 제주 사람들은 ‘이그라진 사람’을 싫어한다. 한 마을에 똑똑한 리더가 있어서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 해 주면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거나 잘난 척을 한다고 느낄 때 그를 배척한다. “이그라진 사람”은 열심히 일해 놓고도 칭찬을 받지 못한다. 서울 아니 미국에 갔다 와서 아는 것이 많아도 마을에 들어가면 모르는 게 많은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 자기가 아는 것, 보고 들은 것을 가르치고 보여주려고 목소리를 높였다면 그날부터 그 사람은 “이그라진 사람”이 되어서 다음부터는 마을에서 겉돌게 된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뺄라지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그라진 사람은 대개 말을 할 때 유식한 티가 많이 나거나 잘 모르는 남을 무시하는 등의 언어구사 때문에 그 말을 듣지만, 뺄라진 사람은 그 사람의 행동이 거스릴 때 그런 말을 듣는다. 내 친구는 초등학교를 서울에서 졸업을 하고 중학교 때 제주로 이사를 왔는데, 친구들과 명랑하게 지내려했지만 잘 안 되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서울말을 쓰고 항상 밝은 모습의 자기를 “뺄라지다”며 나무랐기 때문이었다.  ‘뺄라지다’도 ‘잘나다’와 의미가 비슷하지만 남들과는 다르게 행동이 돋보인다든지 돋보인 행동이 무리들과 어울리지 않을 때 잘난 척 한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뺄라진 사람은 자기만 잘나서 좋은 게 아니고, 그의 뺄라진 행동 때문에 무리들을 좀 못나 보이게 하므로 배척되는 것이다. 중학교 때의 내 친구처럼, 친구의 밝고 명랑한 성격은 그 자체로서는 문제 될 게 없음에도 발표도 잘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시골 아이들의 촌스러움을 돋보이게 하였을 것이다. 뺄라진 아이는 뺄라지지 않도록 경계 하는 말이 “뺄라진 책 허지 말아!” 이다. 그 경고의 말을 받아들여 무리와 비슷해지지 않으면 뺄라진 사람은 무리에서 곧바로 배제된다.


부시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했다가 곤욕을 치룬 문화인류학자의 이야기는 칭찬을 꺼려하는 이유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문화 속으로 들어온 이방인에게 만이 아니라 종족 안에서도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이면에는 “리더”가 생겨 부족 개개인의 관계가 종속 지배로 변질될까를 우려하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제주말에서 발견되는 경계와 배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제주에 영웅이 없다는 옛말처럼, 어떤 잘난 사람을 숭앙하고 그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는 일을 철저히 막아보고자 하던 마음이 잘난 사람의 잘난 면을 인정하여 주는 대신 무리와 높이를 맞추라 요구하였던 것일까? 혹시는 어떤 영웅이 있어서 무리들이 그를 추앙하다 보면 영웅이 저 잘난 맛에 이 작은 섬을 들어 올려 자기 맘대로 해 벌릴까 싶은 두려움이 있어서 그랬을까? 부시맨의 언어 습관에서 제주말의 뉘앙스를 생각해 본다.

 

(원고지 28.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