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2024년 日記帳

아침을 여는 모임, 책상과 노트북/1월2일

자몽미소 2024. 1. 2. 12:13

TV로 유트브를 보기 시작한 게 약 4년이 되었다.
2020년 4월에 이사를 온 후 새로 장만한  티비는 유트브 보기에 좋았고, 푹신한 코듀로이 천  쇼파는 유트브 시청을 더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내가 좋아하던 그림은 <책읽는 여자> 시리즈.  원피스까지 입고 앉아 독서하는 여자가 보기에 좋아서 이사한 집에는 소원풀이처럼 쇼파를 사게 되었다.

그 쇼파에서  나는 책을 읽기도 했지만 주로 넷플릭스와 유트브에 빠졌다.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거의 하루종일 리모콘을 돌리고 있는 여자는 혼자 살지 않는한 다른 식구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나와 24시간을 같이 보내는 남편은 나를 째려보는 일은 없었고 안 그런 척을 하긴 하였지만 상당한 양의 가시가  돋아났을 것이다. 가끔은 남편의 눈이 빨갛게 되는 것이 꼭, 고혈압 때문에 핏줄이 터져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루종일 바람직하지 않는 자세로 시간을 버리고 있는 마누라님표 여자에게
" 그만 일어나!, 운동해야지, 눈 나빠진다, 그렇게 아파!, 진짜로 아파서 그러는 거야?"

라는 진심을 발설하고 싶은 충동이 왜 없었을까. 지적과 충고의 욕구가 왜 없었겠나. 그것이  분출하려는 찰나 "저 사람이 환자지!" 라며 냉정을 되찾을 때 몸 어딘가에서는 열불이 왜 안났겠나.

변명을 하자면,  나와 쇼파가 샴쌍둥이처럼 서로 붙어있던 것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오래가면서 내가 바라고 남편이 바라던 모습을 잊어갔기 때문이다.
주가 또는 비트코인이 불안한 건 기대하는 결과가  안 나오고 예측이 거의 들어맞지를 않기 때문일텐데, 내 몸도  어느 날은 좋아졌다가 어느 날은 거짓말처럼 나빠졌다. 아침과 저녁이 달라 나도 내가 꾀병하는ㅡ게 아닌가 의심을 해 보았다.  껄렁껄렁대긴 하지만 골목대장의 한 마디 말에 꼼짝못하는 부하처럼 몸이 아프다는 신호가 오면 마음도 생각도 기가 빠져 시들했다. 몸살과 두통이 상수값으로 몸을 점령한 상황에서 유트브는 오히려 수다스럽지만 마음은 순박한 친구같았다. 
나는 남편없이 혼자서 여행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남편밖에 난 몰라형 아내인 척을 해 왔지만,  유트브를 보기 시작하면 남편을  본 척도 안 했다. 그를 버려두고 혼자서 자유를 누리느라 쇼파 쿠션에 다리 하나를 척 걸쳐놓는 자유의 자세를 누릴 때 오줌누러 나와 거실을 지나가던 남편은 오만방자한 내 자세를  외면하려 노력했다.
그러거나말거나  이미 내 손에 리모콘을 쥐고 남편은 버려 버린 나는 혼자 놀았다 쇼파에서.
화면속 세상에 눈길을 주고, 여행 유트버의 영상을 졸졸 따라갈 뿐이었다. 수술 후 2년 동안 나는 쇼파에 올라타 유럽의 도시란 도시를 다 다녔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일본 온천에서 몸을 담갔다.
나의 하루는 유트브로 시작했고 유트브의 수면용 음악을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깊지 않았던  밤중에 깨기 일쑤였고 유트버를 벗삼아  밤을 견디며 창밖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티비 화면에 눈을 주며  몸 이곳저곳에서 호소해 오는 몸의 불편을 외면하고 싶어했다.

남편이 커피를 끓여서는 쇼파 옆으로 갖고 와주곤 하던 일이 처음엔 꾀병환자 같은 아내에 대한 서비스였다가 어느새 남편의 일과가 되었다. 남편이 커피물을 데우며 커피 향기로 이 집의 아침을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나는 쇼파에 등을 붙인 채 일어나려 하지도 않았다.
 
두 달 전, 일본에서 돌아온 후 나는 일본생활에서 루틴이 되었던 일상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걸 알았다.
지난 가을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걸으며 이제 걷는 게 습관이 되었다고, 하루에 만오천보는 걷는다고 나는 '걷는 여자'라고 자랑하던 나였지만,  제주로 돌아온 후 얼마없어  나는 신발끈을 묶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기보다 집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일본에서는 거의 보지 않던 유트브 시청으로 어느 새 돌아가고 있었다.   기지개를 펴며 모아보려는 아침의 힘이 티비화면에 힘을 잃고 휘발되는 것 같았다.
 
지난 달 어느쯤에 < 아침을 여는 모임>에 초대받았다. 누구라도 먼저 아침을 열 수 있다는 게 그 모임의 규칙이었다. 책상에 앉는다. 차나 커피를 마신다면 그 잔도 함께 매일 오전에  인증사진을 보낸다, 이렇게 아침을 여는 모임의 규칙은 단순하였다.
<나는 책상에 앉아 있습니다>, 라는 메세지를 사진 한 장으로 보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규칙이 마음에 들었고,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메세지를 보내고 싶어서 책상에 앉았다. 어느새  오전 책상이 중요한 내 일과가 되어가고 있다. 책상에 앉지 않고 인증샷도 보내지 않으면 부속 하나가 빠진 기계처럼, 하루의 소리가 덜그덕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리듬이 생기고 있는데 엇박자가 나는 걸 불편해 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편안하게 하려면 책상에 앉아야 했다.

어떤 날은  사무실에 출근하는 공무원처럼  책상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9시 전에  집안살림을 정리했다. 정말 출근하는 사람처럼 현관을 나서서 마당으로 나가도 보았다.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한 잔 사오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책상에 앉았지만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숙제검사를 한 담임 선생님이 찍어주는 '잘했어요 도장'처럼 사진을 찍어 보내고 있으면 나에게 흐믓해졌다.  
지각이면 어때, 결석 안 하는 것만 해도 좋아! 웃음이 많고 다정한 친구가 말해줄 것 같은 목소리가 내 속에서 들려왔다.
 
오늘 새벽에 눈을 뜨면서, 올해 2024년에는 노트북을 옆에 끼고 있어야겠다 생각했다. 책상에 앉게 되었으니까 노트북을 열어도 좋겠네! 
거의 방치하다시피 안 보고 있는 티스토리, 나의 블로그 방에 돌아가야지 생각했다. 재작년에 티스토리로 바뀌고 나서는  티스토리에는 스마트폰으로 사진만 올리다 말다했다.  이미 쌓여있는 게 많아서  계정삭제를 하지 않지만 가끔 사진을 올리고 메모를 하는 게 전부이다. 스마트폰으로 티스토리에 연결하면서 노트북으로는 티스토리에 들어가지 않게 되어갔다. 어느새 손가락이 자판을 어색해 하고 있었다. 

<아침을 여는 모임을 했더니 나는 책상에 앉게 되었습니다>, 는 한 문장을 쓰려 이 화면에 들어왔는데  노트북 자판 위에서 한 시간 째 내 손가락은 놀고 있다. 책상 위에서 내 마음이 쉬고 있다.